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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건달 Aug 14. 2024

FW #38, 남한산성(44.7km)

누적거리: 2106.26km, 누적시간: 425시간 55분

표지사진: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서문’


남한산성에서 낯선 남한산을 만나다
「나는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오늘 ‘미친듯이’ 걷기, 서른여덟 번째 코스는 ‘남한산성’이다. 마포 집에서 출발하여 한강고수부지를 타고 잠실을 거쳐 지하철 8호선의 끝, 마천동과 위례를 지날 예정이다. 총 거리는 왕복 64km이며, 남한산성을 지나 카페 한 곳과 음식점 한 곳을 다녀오고자 한다.

마포 > 이촌 > 반포> 잠실> 마천 > 남한산성 > 광주, 왕복 총 64km, 18시간 이상


날씨는 어중간한, 그러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올 수 있는 겨울의 끝 하루이다. 이럴 때는 애매해서 두껍게 입기도, 얇게 입고 나가기도 선택이 어렵다. 그래도 혹시 눈이라도 내릴 가능성에 얇은 패딩 위에 털잠바를 하나 걸쳤는데,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집을 나와 용강동(龍江洞)으로 빠진다. 용강동은 마포강의 용머리에 해당하는데, 옛부터 고깃집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포 하면 고깃집 골목이고, 특히 돼지갈비로 유명한 ‘조박집’이 있다.

마포 용강동. 오전 하늘은 맑다.이 맑음이 하루종일 계속되었으면 싶었다




한강고수부지의 ‘토정나들목’으로 나와 반포대교 방면으로 걷는다. 바람은 없고 춥지도 않다. 그래서일까? 지난 12월과 1월,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자전거 부대가 부쩍 늘어났다. 걷다 보면 가끔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자전거 경주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규정 속도를 넘어 굉장히 위험하게 달리는 사람들. 그들 스스로는 락(樂) 일 수 있어도, 그들의 자신감은 배려심이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惡) 그 자체다.

한강자전거대여소
한강공원은 11개 지구, 한강자전거대여소에는 13개 구역에 위치해 있다. 각 지구별로 한 개 이상 존재하며, 한강은 전국에서 자전거 타기 제일 좋은 장소라 말할 수 있다.

라이딩하시는 분들은 속도를 줄일 필요가 있는데, 실시간으로 사고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이쿠‘도 아니고, 부딪히면 그 순간 ’어! 억!‘ 소리를 낸다. 저 멀리서도 들릴 정도다. 사고는 정말 한 순간이다.


한강고수부지는 겨울이 끝나기 전, 각종 공사가 한창이다. 얼어붙은 땅이 풀려 가끔 진창길도 나오고, 피해 가려다 풀을 밟은 김에 멈추어 풀 속으로 들어가 본다. 갈대가 반긴다. 갈대가 푸르러야 봄인 줄 알겠는데, 갈대는 여전히 갈대다.

갈대가 푸르러야 봄인줄 알겠는데, 갈대는 항상 갈대다



마포에서 반포대교까지 거리는 약 7km. 어디에서든 반포까지 오면, ‘아! 이제 7km만 걸으면 집이구나’ 생각한다. 반포대교 가는 길이 울퉁불퉁 한 걸 보니 내 신발 같다. 그들의 인생이 닮았다.

서로의 상처와 영광은 같다. 누군가는 밟혔고, 누군가는 밝았고


반포대교 아래 잠수교는 매주 일요일 통행을 막고 ‘걷고 싶은 거리’를 조성한다. 늦은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열리는데, 각종 행사를 구경하며 힐링이 되는 코스 중 하나이다. 먹거리, 볼거리, 놀거리 등 ‘코로나’ 이후 답답하게 막혀있던 가슴이 뻥 뚫린다.


걷기를 시작하면서, 잠수교도 참 많이 건너봤다. 바로 눈앞에서 한강물이 울렁대면, 태양빛에 비추이는 물결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것은 꼭 ‘꽃이 아닐지라도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잠수교에서 바라 본, 새빛 둥둥섬. 그새 날이 흐려져 물결도 잿빛이다


반포대교를 건너 한남대교, 그리고 성수대교를 지나 잠실대교까지 한달음에 왔다. 나는 먼 길 걷는 것도 도가 텄거니와, 이렇게 좋은 평지를 걷는 일은 일도 아니다. 이제 남한산성까지 대략 9km 남짓 남았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에 가렸지만 맑다. 시원한 바람이 평평한 길을 따라 나를 스치고 저만치 간다. 확실히 뜨거운 여름보다는 걷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한남대교를 지나 동호대교로 걷는다. 건너편 UN빌리지가 마주 보인다




잠실한강공원의 진출입로를 나와 잠실로 빠진다. 큰길을 두고 일부러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 뒷길로 간다. 잠실 5단지는 이 지역의 장미아파트와 더불어 가장 오래되었으며, 재건축을 기다리는 잠실의 랜드마크 격인 아파트이다.


30년 전, 신천역(지금의 잠실새내역) 근처에서 미대 입시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 500원짜리 부산어묵도 그때 처음 먹어본 듯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따로 없어 후다닥 어묵만 먹고 들어가던 시절, 잠실 5단지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당시 잘 사는 동네 중 하나였었고, 가까웁게 귀가하는 학생들을 보며 ‘저 친구가 나였으면’ 하는 바램이 한가득인적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잠실주공아파트 뒤편으로는 쓰레기도 많고, 철조망도 많이 낡아있다. 주차장이 다소 넓은 편인데 곳곳의 오래된 소나무와 함께 느린 경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킥보드를 보니,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을 거리에 그냥 두고 간 심보가 얄궂다.

잠실아파트 후미진 뒷길은 인적이 드물다. 이런 곳에 전동킥보드 한 대가 놓여있다. 타는 곳도 아니고 내릴 곳도 아닌데, 누가 가져다 놨을까? 5단지를 빠져나오니 월드타워가 보인다


잠실 롯데월드를 끼고 석촌호수 왼편으로 돈다. 몇 백 미터를 지나 오른쪽 방이동과 오류동으로 빠져나간다. 이제 직진 코스로만 가면 된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을 가 본 적도 없지만, 보이지도 않을 성곽이 벌써부터 눈에 아른거린다.

잠실 롯데월드 ‘석촌호수’. 바람 쐬러 나온 청소년들이 많다
방이동을 지나 8호선 거여역, 그리고 마천동으로 직진한다




사실, 오늘 메인 목적지는 남한산성이 아니다. 커피를 만드는 지인이 남한산성 근방에 있는 좋은 커피집이 있다고 추천해 주었는데, 남한산성을 가로질러 코스를 잡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커피 한잔을 마시겠다고 장장 3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가는 중이니,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그리고 남한산성이 어디에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고 왔다는 것이 결국, 가장 큰 난관이 되었다. 낙산처럼 그저 동네 성곽 정도로만 알았는데, 내 머릿속 돌덩이 하나가 들어와 앉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도대체, 남한산성은 어디에 있는 거야?


마천을 지나 위례로 빠지니, 저 앞에 산이 하나 보인다. 맵의 이동 코스가  산을 가리키는데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저 산을 타고 오르라는 것인가?’ 동네 어귀부터 산성의 윤곽이 눈에 보일 줄 알았었는데, 한 톨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맵은 저 산을 오르라 한다.



헉! 남한산성이 남한산에 있었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남한산성이 남한산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한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북한산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왜 남한산은 상상 한 번 못해봤을까?


수원 시내에 있는 수원산성처럼, 남한산성도 마을 어귀에 어스름히 있을 거란 착각은 도대체 누가 해 준 것일까? ‘에휴, 큰일이다.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28km를 걸어왔는데, 갑자기 산을 오르라니... 넉 달 전 광교의 트라우마가 돌덩이가 되어 머릿속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저 오른쪽 아파트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걷다보면 자주 있는 일이다
이렇게 평탄한 길로만 가는건가? 하고 착각을 했다
하남시 감이동. 남한산성 등산로의 시작점이며, 나중에 어느 블로그를 찾아보니 가팔라서 추천을 하지 않는단다. ㅎ


마을을 지나 드디어 남한산 어귀에 도착했다. ‘하남위례길’ 게시판이 붙어있다. 거리가 멀지는 않은데, 남한산성이 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감싸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 위치는 남한산성 입장에서 보면 침략지이다. 저 꼭대기에서 막고 있는 거지. ‘그래, 산을 어렵게 타고 올라가면 산성이 막고 있겠구나.’

하남위례길의 시작. 저 곧게 뻗은 계단이 수직으로 뻗어있다


갑자기 산에 오르라 하는데,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다. 운동화 밑창은 다 떨어져서 마찰력 하나  없었고, 게다가 산길에 쌓인 낙엽은 눈과 비에 젖어 상당히 미끄러웠다. 왜 이놈의 맵은 자꾸 최단거리만 먼저 보여주는지. 인지를 채 못하고 걷다 보면 나는 어느새 ‘자연인’이 다 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다. 여기가 어디야? 싶을 정도로 발은 쭉쭉 미끄러지면서, 자꾸 엄한 산길 위로만 올라가란다. 희미하게 길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도무지 사람 손을 안 탄 지 몇 개월은 되어 보였다.

여기가 길 맞는건가? 수북히 쌓인 낙엽 사이로 나무 계단이 보인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내려왔다. 온라인 맵 대신, 주변 이정표를 따라 다시 오르니 제대로 된 계단이 나온다. 몇몇 분이 헉헉 대면서 내려오는데, 올라가는 나는 얼마나 더 헉헉댈까 싶다. 발이 저리다 못해 힘이 없으니 올바른 계단에서도 잘 미끄러진다.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은 오늘로써 생명을 다 할 듯싶다. ‘그래, 이 녀석 지금까지 정말 고생 많이 했지.’ 이 신발 하나로 2천 킬로 넘게 걸었으니 말이다. 드디어 저 앞에 성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계단을 힘써 내딛는다.

색감을 잃은 갈색 나무 숲 사이로 성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지막 계단인가 싶은, 남은 계단을 힘껏 밟아 올라선다
드디어, 남한산성 ‘서문’이다
서문을 통과해 남한산성도립공원으로 들어선다. 환하게 반기는 듯 하다


생각지 못했지만 결국 남한산을 넘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길은 얼음으로 가득 덮여 있어, 더욱 조심조심 걸었다. 성곽을 따라 반바퀴를 돌아 내려왔다. 주변에 음식점도 많고 광주로 뻗은 2차선 도로가 다음 코스를 가리킨다.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라고, 이제 다시 광주로 내려간다. 5km만 더 가면 드디어 목적지인 ‘아라비카 커피집’이 나온다. 바람은 차갑고 태양은 없다. 그리고 어느새 날도 저물어간다. 이 길을 따라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우선 몸도 녹일 겸 다른 생각을 접어두고 커피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따듯한 커피 하나를 주문한다.

[바리스타 추천 커피집] 남한산성 ‘아라비카’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밖은 벌써 늦은 오후시간대라 걸어서 가기에는 자신이 없다. 저 산을 또다시 넘어가다가는 밤중에 산속에서 귀신을 조우할 것만 같다. 오늘 목적지가 두 군데이므로, 나는 마지막 목적지까지는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것도 계획에는 없었다. 온전히 걷기로만 했던 와중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는 일은 처음이다. 아쉽지만, 광주 이곳에서 버스조차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시 외각의 버스 정류장. 버스가 한참만에 오는데, 이 또한 운치가 있다
두 번째 목적지를 위해 산성역에서 문정역까지 지하철을 이용했다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는 문정동의 ‘골목떡볶이’집을 팩트체크 하러 왔다


오늘 하루가 참 길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떡볶이 하나 먹는 데에 장장 40km를 넘게 걸었다. 커피는 준수했고, 떡볶이는 서울 3 대장 떡볶이집이라 하는데 그저 그랬다.

[팩트체크] 서울 문정동 ‘골목떡볶이’


돌아가는 길에 조금 더 걸어간다. 문정동에서 가락시장으로, 그리고 다시 헬리오시티를 지나 탄천을 걷는다. 밤은 어둑하고 저 너머 월드타워가 네온으로 환하다. 밤이 되니 춥기는 하다. 아침에 고민하고 선택했던 털잠바가 빛을 발한다. 삼성역에 도착했다. 너무 늦어지니 집에서 언제 오냐고 전화가 온다.


어! 나 버스 타고 가고 있어. 곧 도착해!


아직도 한참을 남았는데, 안심을 시켜주려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혼날까봐여서였을까? 혼자 키득거리며 버스를 기다린다. 밤이 정말 깊어만 간다.

가락동 헬리오시티를 지나 탄천으로 이동한다
탄천의 밤은 고요하고 깊다
저 끝에 월드타워가 휘황찬란하다. 나는 탄천을 건너 삼성동으로 간다


- 끝

마포 > 반포대교 > 잠실 > 마천 > 위례 > 남한산성 > 광주 아라비카 > 문정동 > 삼성동으로 이어지는, 총 거리 44.7km, 53,010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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