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819.84km, 누적시간: 165시간 28분
표지사진: 부산 동구 춘장대로, ‘가지 않는 길’
가뿐하지 않게, 부산 2일 차!
23년 8월 23일, 부산 걷기 여행의 둘째 날 목적지를 ‘태종대’로 정했다. 해운대에서 대략 25km. 오늘 적어도 40km 이상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오륙도’를 거쳐서 가기로 했다.
부산 태종대는 영도구에 있는 명승지이다. 지역 이름은 신라 태종 무열왕이 들러서 활쏘기를 하고 연회를 개최했던 곳에서 유래하며,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남해 바다와 어우러진 비경으로 유명하다.
걷기 전에, 일단 숙소부터 예약했다. 검색을 해 봐도 태종대 유원지 근처로는 마땅한 호텔이 없었다. 결국, 유원지에 한참을 못 가서 ‘한국해양대학교’ 근처에 있는 ’시타딘커넥트 비즈니스호텔‘을 잡았다. 어제 첫날을 숙소에서 지내보니까, 하루종일 옷이 땀에 절어 객실 내 세탁이 반드시 필요했다. 오늘 예약한 곳은 레지던스 비즈니스호텔이라 객실 내 세탁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부산, 2일 차 코스>
피곤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부산행 첫 차를 타기 위해 어제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그렇게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30km를 넘게 걸었으니 몸이 가뿐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피곤이 덜 풀린 문제보다도, 아침부터 햇살이 너무 강해서 그게 더 큰 걱정이 되었다.
폭염이라, 오늘 정말 각오해야겠는걸?
혼자서 마음을 다잡고 숙소를 나왔다. 덕지덕지 선크림을 바르고, 무릎 파스도 붙이고. 해운대 모래사장이 벌써부터 태양 열기로 반들거렸다.
바닷가에 파라솔이 무척 많이 있었다. 입추가 지나서 폐장을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8월 말까지 개장을 하나보다. ‘이 더위에 벌써 폐장은 아쉽지.’ 혼잣말을 하며 반질거리는 모래사장을 지나 저 끝에 있는 ‘동백섬’을 향해 걸었다. ‘웨스틴조선호텔’이 햇살에 하얗게 빛이 나고 있었다.
어제 첫날은 도심 한복판으로만 걸었다. 뜨거운 아지랑이가 아스팔트 전면에서 기어 나왔다.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했다. 뜨거운 태양에 그늘 없는 도로는 정말 힘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동백섬과 오륙도 등 ‘해파랑길‘을 따라 바다를 옆에 두고 걷는다. 다소 흙길도 기대가 되고, 무엇보다도 ‘바닷바람이 한 줌이라도 있겠지?’ 하는 마음에 내심, 어제보단 편안한 코스를 예상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전망 좋은 ’해파랑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만 생각했다. 해운대에서 한참 평지를 걷다가, 다리가 아파질 때쯤 오륙도의 ‘장산봉’과 ‘이기대공원’ 산길을 올라야 하는지를 정말 모르고 갔다.
해파랑 1길은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출발해 광안리해변과 APEC해변을 지나 해운대에 이르는 구간이다. 해식절벽(해식애)과 동해안의 자연경관은 물론 화려하고 번화한 광안리, 해운대 관광을 겸할 수 있다. 보통 오륙도에서 출발하여 해운대에 도착하는 코스인데, 이를 거꾸로 이동 시 오륙도의 ‘장산봉’을 올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도 아침 햇살 맞으며 수변 좋은 광안리를 지날 때만 해도 좋았지.
해운대 ‘영화의 거리’에서 아침식사로 미역국을 먹고, 부산요트경기장을 지나 광안리까지는 그래도 걸을만했다. 어제 뭉친 다리 근육도 슬슬 풀어가며, 덥지만 아직까지는 햇살이 따갑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구름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드디어 광안리해수욕장을 지나 부산 광안대로와 분포교를 넘어 오륙도에 접어들었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은 부산시 남구 용호동 일대에 있다. 오륙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근린공원인데, 이곳을 오르는 길이 험하거나 높지 않음에도 숨이 턱턱 막혀온다. 바다 옆이라고 해서 결코 바닷바람이 불지 않았다. 기대했던 예상이 빗나가자, 체감 온도는 극도로 높아져 40도에 가까워 오는 것 같았다.
오륙도 해맞이공원 정상에 위치한, ‘장산봉’과 ‘이기대공원’으로 가는 길은 숲길과 나무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단 하나하나 밝고 올라가는 내 발소리를 산새 소리에 맞추기도 하고, 이름 모를 벌레 소리에 맞추기도 했다.
정말 숨이 턱에 다다르자 ‘에고… 정말 힘들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끝이 보이는 언덕인데도, 왜 이렇게 계단은 많은지. 처음 와 보는 곳이라, ‘보이는 끝도 끝이 안나는 것’ 같았다.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끝’에 다다르자 드디어 ‘오륙도’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는 완전히 중천에 떠 있어 내 얼굴이 땀범벅으로 일그러졌다. 이제는 어디 들어가서 잠시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체력도 바닥이 나고, 어서 생수를 들이켜야 살 것 같았다. 일단 후다닥 사진을 찍어 좌표를 남기고, 바로 옆 카페에 들어가 빙수를 시켰다. 드디어 해파랑길이 끝이 났다. 빙수를 허겁지겁 몇 스푼을 들이켜니 그제야 드넓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절반 정도 온 것 같다. ‘이제 절반이라니…’ 이제 다시 도심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어제만 해도 왔다갔다 두 번을 거친 ‘부산역’을 또 한 번 지나가야 했기에, 이제 부산역 앞이 아닌 뒷길로 해서 걸어가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 부산역에 올 때쯤, 서서히 해도 기울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오기 전, 태종대 초입인 부산대교를 건너 ‘영도’에 도착하기만을 바랬기에 걸음을 더욱 재촉해 걸었다.
부산역 뒷길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이 맞붙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사람이 걸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도로마다 움푹 파인 것은 물론, 얼마나 이동이 없었으면 도로에 풀들이 무성했다. 특히 부산역 뒤편으로 폐공장들이 많았는데, 사람은 없고 덩그러니 녹슨 대문들만 굳게 닫혀 있는 것이 여간 을씨년스러울 수가 없었다.
부산항만을 바라보고 열심히 걷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가뿐할 것 같던 코스는 전혀 가뿐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오늘 코스 중, 최악의 코스를 지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어둠이 완전히 깔리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다.
나는 부산 ‘영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뒤늦게서야 알았던 것이 ‘영도’가 기가 쎈 동네이며, 그래서 밤늦게 다니기는 매우 어려운 동네 중 하나라는 것을 나중에 후배를 통해서 듣게 되었다.
아무튼 이제 ‘부산대교’를 건너 드디어 영도에 진입을 하게 되었다. 얼추 30km를 넘게 걸었으니, 적어도 10km만 더 걸으면 오늘의 목적지에 다다른다.
동네도 처음이고 길도 모르니, 오로지 카카오맵만 켜 두고, 어둑한 도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길이 가야 될 길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다시 산을 오르는 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골목을 타고 올라가는데, 동네가 평지가 아니라 높은 구릉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 시선을 잡는 것들이 하나 둘, 아니 수십여채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무당과 신을 모시는 집들이었다.
아… 정말 오싹하고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여기 왜 이렇게 무당집이 많은 거야?’ 집들마다 신을 모시는 패가 밖으로 나와 있고, 길은 어둑하여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끝도 없이 위로만 올라가고 있었다. 간혹 차들이 지나는 가는데, 길도 협소할뿐더러 집들마다 대문이 도로에 인접해 있어 찻길인지 마당인지 구분이 안 갔다. 게다가 저녁 9시가 넘어가는 동안,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가 않았다.
맵을 다시 재생시켜 길을 바꾸었다.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계속해서 오르는 것은 너무나 불안했다. 어느 슈퍼에 다다르니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봉래산 슈퍼? 여기가 봉래산인가 보다. 그냥 평범한 동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도가 평범한 동네는 아니더라.
바다를 나가는 어부들이 무사 귀환할 수 있게 빌고 기도를 올리는 곳이 영도라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무속신앙과 함께 신집들이 많은 거라 한다. 나중에 돌아와서 들어보니, 결코 밤에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는 동네라는 것을 알았다. 몰랐으니 갔지, 알았으면 절대 밤에 가지는 않았을 테다.
봉래산을 내려오니 드디어 번화가다운 시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바다보다도 더 반가웠다. 도로블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제 그 끝에 다다르니 힘든 것도 모르겠다. 아니, 그냥 감각이 없었다. 어제오늘 합해서 70km가 넘었는데, 어쩌면 잠시 잠만 자고 이틀 연속을 내리 걷기만 한 것 같았다.
저 멀리 숙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반가우면서도 부산일정의 반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아쉬웁기도 했다. 내일은 또 내일대로 열심히 걸어야겠지만, 오늘 하루가 1만 년같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혼자서 치킨 한 마리에 맥주를 사 들고 호텔 입구에 들어서니, 프런트에 앉아있던 호텔리어가 ‘웬 노숙자가 들어오나?’라는 눈빛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