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682.73km, 누적시간: 138시간 17분
표지사진: 서울시 봉천동 ‘봉천제일종합시장’
내 인생, 가장 힘들었지만 찬란했던 20대의 끝을 ‘봉천동’에서 보낸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을 나와 하숙방을 전전하다, 매달 나가는 월세가 아까워 모으고 모아서 전셋집으로 들어간 곳이 ‘봉천동 옥탑방’이었다.
옛날에 흔히 서울 달동네 하면 봉천동이었다. 7~80년대에는 관할지역 대부분이 판자촌이었고, 그나마 90년대에 들어서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받든다‘는 뜻의 봉천동은 서울에서 대표적인 달과 가까운 동네 중 하나였다.
봉천동은 조선시대 때, 경기도 시흥시 봉천리에 속했다가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 봉천동의 북쪽과 남쪽 사방팔방이 산과 고개로 둘러싸여 있는데 사당 방향으로는 ‘까치고개’ 남쪽에는 ‘관악산’, 서쪽으로는 ‘쑥고개’, 그리고 북쪽 신대방으로 ‘모자원고개‘가 있다.
옥탑방에 살면서 가슴 아린 추억 중 하나가, 뜨거운 여름날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하나로만 버티며 팬티만 입고 지냈던 날들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주택가 옥상에 바퀴벌레가 엄청 많았다는 것」. 하나 둘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쏘다니는 모습들을 보면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옥상에만 기어 다니면 다행이게? 어느 날은 자고 있는 내 침대 안에서도 종종 조우하고는 했는데, 인터넷에서 ‘인간은 잠자는 동안 평생 대여섯 마리의 바퀴벌레를 먹는다’라는 글을 읽고 까무러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빨래’에 맞아본 적이 있던가? 우습게 들리겠지만 「빨래를 휑! 걷다가 얼어버린 청바지에 입술을 맞아 옥상 바닥에 나자빠진 적」이 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으로, ‘내 다음번에는 기필코 트롬 세탁기를 구입하리라’ 다짐을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옥상에 세탁기를 들일수가 없어서 이전 주인이 사용하던 세탁기를 5만 원 주고 물려받았는데, 탈수기가 고장 나서 손으로 직접 물을 짜냈어야 했다. 특히 청바지는 재질이 두꺼워 물짜내기가 엄청 힘들었었고, 겨울에 옥상 빨랫줄에 걸어 놨더니 청바지는 그대로 강철바지가 되어 있었다. 봉천동, 나에게는 젊음이자 아픔이 공존하는 동네이다.
비 오는 일요일, 걷기 목적지를 서울 관악구의 ‘봉천동’으로 잡았다. 2년간의 옥탑방 생활을 마치고 첫 신축 빌라를 얻어 마포로 이사 온 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때 그 봉천동은 아직도 그대로일까? 너무 많이 변해 있어서, 추억이 싹둑 잘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역대급으로 한반도를 강타한다던 태풍 ‘카눈’은 어제 8월 11일 자로 소멸되었다. 오늘은 그 여파로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수준이었고, 우비를 챙겨 밖을 나왔다. 이제는 비 오는 날도 걷는 것이 습관이 되면서, 가장 갖고 싶은 아이템 중 하나가 ’근사한 우비’가 되었다. 일회용 비닐 우비를 여러 번 빨아 쓰다 보니, 고린내가 잘 빠지질 않는다. 땀과 비로 젖은 냄새가 아무리 강력한 세제를 써서 세탁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비싼 우비가 좀 낫겠지 싶어 ‘아! 이거 진짜 마음에 드는데?‘라고 끌리는 녀석을 찜했다가, 녀석이 50만 원대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냥 마음을 접었다. 평생 우비 없이 살았는데도, 첨단 패션을 입은 그 우비가 아직도 머리에 아른거린다.
마포역에서 봉천동까지 걸어가기 위해서는 용산 한강대교를 건너, 상도동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숭실대학교 방향으로 봉천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서울대입구역이 보이고, 이어서 신림으로 1km 남짓 이동하면 된다. 지도상으로는 전체 거리가 11km 밖에 안 되는 짧은 코스다.
우선 마포 도화동을 거쳐 이촌동으로 걸어갔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가득했다. 언제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온 동네가 태풍의 끝을 장식하며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이촌2동은 ‘서부이촌동’으로도 불리는데, 최근 용산역 개발 바람을 타고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고 있다. 예부터 교통편이 썩 좋지 못한 외진 동네에 불과했지만, 조만간에 「용산 빌딩들을 마천루로 삼고 한강을 마주한 고급진 동네」로 바뀔 듯하다. 특히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수많은 천주교 지도자들이 순교한 ‘새남터‘ 자리에는, 순교를 기념하는 천주교 성당이 지어져 있는데(1987년 건축) 그 자태가 매우 경건하고 웅장하다.
이촌동을 빠져나오니 한강대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노들섬 복합문화공간’에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각종 피트니스 센터에서 나와 홍보도 하고 운동도 즐기는데, 그들의 젊은 혈기가 부러웠다. 나도 지금 열심히 걷고는 있지만, 저 혈기에 내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 싶어 살짝 내려갔다가, 슬쩍 구경만 하고 금방 빠져나왔다. 웃통을 벗고 가슴 근육질 빵빵한 그들과, 지난번 ‘부천’에서 5000원 주고 산 카우보이 모자에 땀을 삐질 흘리는 나하고는 ‘혈기’에서 천지차이가 났다. 그나마 무료로 나누어 준 음료수 하나 건져 마음은 행복했다.
상도터널을 빠져나와 숭실대 방향으로 걷는다. 숭실대학교 건너로 ‘상도근린공원’과 마을 골목 사이를 누볐다. 어느 동네건 낡은 골목과 길들이 좋다. 버거운 무릎을 달래고 천천히 오르다 보면, 다 똑같은 서울 골목도 동네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근린공원 계단을 밝아 오르다가 이내 봉천고개 큰길로 빠져나왔다. 산을 타기에는 무리일 것 같고,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것이 한바탕 비가 쏟아질 듯 싶었다. 봉천고개 내리막길마다 큰 교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짧은 간격으로 대형 교회들이 있다 보니, ‘여기 상권이 많이 발달했었네. 오밀조밀 사람들이 많이 살았었네’ 하는 추측이 가능했다. 교회로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 많은 곳에 우후죽순 교회가 세워지기도 한다.
이제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봉천동 ‘봉천시장’에 도착했다. 20년 전 기억을 더듬어 내가 살던 주택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봉천시장도 이전보다 도로가 넓어졌고, 복잡스러움이 한층 사라졌다. 게다가 내가 살았다고 추정되는 주택가는 한 귀퉁이가 터억 떨어져 나갔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도저히 여기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되는 것을, 나는 언덕을 타고 천천히,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봉천동 옥탑방에 사는 동안,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때는 매일 회사 출근시간이 새벽 6시였었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를 넘기기가 일쑤였었다. 휴일에는 덥거나 추운 옥탑방보다는 주로 강남이나 종로로 나가 돌아다녔다. 그래서인지, 오늘 부푼 기대감을 안고 왔음에도, 유달리 봉천동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나의 기억 속의 봉천동은 동네가 아닌 ‘옥탑방’에만 머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좁은 골목 주택가는 가로등 불빛으로 희미했고,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마저 어두컴컴해서 손 짚고 엉금거리며 올랐던 기억이 무심코 떠올랐다. 그리고 가끔 밤에 나와 옥상에 서 있을라치면, 지천에 깔려 있는 벌레만큼 지근거리 집집마다 창문들이 별빛으로 쏟아졌었다. 그러한 과거의 기억들이 점점이가 되어 내 머리에서 흘러나와 빗줄기로 흩어져 간다.
내가 갖고 있던 추억들이 사라지자, 나는 더 이상 여기에서 얻을 영화(榮華)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언제 찾아온들 짧게 지나간 내 청춘의 삶들이 그 자리에 영원히 기다리고 있진 않을 테니까. 「그저 한 폭의 그림으로 내 머릿속 자화상으로 남는 것이, 나와 봉천동의 약속」일 것이다. 빗줄기에 생각을 버무리다 보니 어느새 동네 입구까지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봉천동을 떠나 사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