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1525.35km, 누적시간: 310시간 02분
표지사진: 용인시 동천동 ‘가을 황금 길’
10월의 마지막 주간. 도심의 거리는, 만연한 가을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새벽 1시 30분, 알람이 깊게 울린다. 두 시간을 잤을까?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얼굴이 초췌했다.
‘아직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하구먼.’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바로 씻기 시작했다.
오늘이다. 영화배우 하정우 님이 권고한? 또는 자랑했던 ’ 하루 10만 보‘ 걷기에 도전하는 날. 수많은 사람들이 시도했다가, 다들 거품 물고 포기했다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충 가방을 싸고 밖으로 나왔다. 동네는 그 생각보다 더 어두웠다.
하루 10만보를 걷는다는 것. 의미가 깊었다. 한 달 전, 50km를 걸을 때도 겨우 6만보를 넘겼는데. 10만보는 그 이상의 땀을 담보해야 한다. 어디로 걸어야 할지 고민은 없었다. 벌써 마포에서 광교까지 각각 편도로 해서 왼쪽, 오른쪽으로 걸어봤으니 나는 오늘 광교를 향해 왼쪽으로 출발해서 오른쪽으로 돌아 올 예정이다.
Around!
한강 바람이 차다. 그래도 걷다 보면 또 더워지려니 하고 바람막이 없이 반팔로 걸었다. 운동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깊은 새벽은, 무섭다. 달빛마저 달무리로 번져 한강 전체가 호러다.
하루 10만보는 얼마나 걸어야 하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새벽 2시에 출발하면 오늘 안으로는 들어오겠지 생각했다. 잠을 깊이 못 자고 전 날의 피곤을 그대로 짊어진 채 걸었다. 그래도 한 번 걸어본 길이라 낯섦에서 오는 더딤은 없었다. 양재에서 판교로 넘어가는 ‘대왕저수지’를 가급적 동틀 때즈음 지나가기 위해 속도 조절을 했다. 그곳엔 분명 귀신이 있을 테니까. 새벽 네시만 피하면 된다. 왜냐구? 죽을 사(死) 니까. ㅋㅋ
판교에 들어섰다. 대략 5시간, 28km 지점이다. ‘이런, 시계 어디를 눌러야 하지?’ 몇 만보를 걸었는지 정보가 없다. 종료를 눌러야 나오는데… 10만보를 가늠하지 못한 채로 계속 걸어야 하나보다. 여차하면, 집 가기 전에 10만보 달성 시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아직 한참 남았을 테니.
가을이 짙다. 거리마다 단풍이 한창이다. 서울과 경기가 그 한 블록 차이로 이렇게 다르다. 서울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는데, 아직 여기는 단풍 구경할만하다.
꽤 졸리지만 두 번째 오는 길이라 무난했다. 지난번처럼 분당에서 뻗어 노숙인처럼 의자에 드러눕지도 않았다. 토요일 오전 10시, 드디어 반환점인 ‘광교호수공원’에 도착했다. 하늘은 쾌청했고, 이 정도 컨디션이라면 ‘부산‘까지도 가겠다고 허세를 부렸다. 그때뿐이었다. 지금이 제일 좋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돌아가는 길,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고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반환점을 돌고 잠시 쉬다 보니 오히려 피곤이 더 몰려왔다. 그보다도 잠이 쏟아졌다. 새벽 2시부터 걸었으니 그럴만했다. 태양이 작렬하는 ‘광교’는 한적했다.
계속 걷다 보면 꼭 정해놓은 맵(코스)대로 가는 건 아니었다. 저 앞에 무언가 끌리는 장소가 보이면 거기를 꼭 들러서 가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 안 보면 언제 와 보겠어?’라는 심정으로, 원래 돌아가는 길이었던 ‘의왕시‘가 아니라 광교산 ’고기리유원지‘ 방향으로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큰 길이 안 보인다. 점점 산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오늘 같이 아주 긴 거리를 걸을 때는 절대 산을 타면 안 된다. 그럴 계획은 전혀 없었다. 나는 다만 고기리 유원지가 궁금했을 뿐인데,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의 낮은 언덕을 한참을 걸어왔다.
일단 더위를 식히고 목을 축이고 싶었다. 그래도 유원지 가는 길이라고, 여기저기 맛집과 카페가 보인다. ‘그래, 여길 찾아오는 사람들이 설마 산을 타고 오지는 않았겠지?‘ 그런 위안을 담고 카페엘 들어섰다.
이제 한낮의 태양도 깊은 산으로 내려갈 준비를 한다. 결국 나는 오늘 세 개의 산을 넘고 말았다. 돌아갈까를 한참 갈팡질팡도 하고 눈에 별로 높지 않은 산이라고 올라갔다가 어디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광교산, 용달산 그리고 청계산을 건너 과천으로 빠졌다.
정말 미친 짓이지!
걸으면서 이렇게 무릎이 아파본 적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어둠에 길을 잃어 산속에 갇힐까봐, 더 빨리 산을 타고 내려오는 과정은 치열한 인생이었다.
드디어 과천 시내에 도착했다. 생체 에너지가 다하여 움직이기 아주 어려웠다. 69km 즈음에서 배터리가 꺼질 것 같다고 시계에서 알람이 울린다. 얼른 저장을 하고 핸드폰 앱으로 전환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즈음이면 충분히 10만보를 달성했을 거라 생각하고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앱 전환이 되면서 확인을 해 보니 9만보라고 찍혔다. ‘헐! 산을 그렇게나 탔는데, 10만보도 안된다고?‘ 나중에 알았다. 산을 타면 오히려 걸음 수가 적게 나온다는 것을. 그렇게 부리나케 사당에서 버스를 내렸다.
이제 마포까지 10km를 더 걸어가면, 충분히 10만보는 달성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을의 정점에서 새벽에 본 한강을 다시 저녁 늦게 바라보니 반갑다. 왔던 길을 되돌아 그를 바라보니, 짧은 하루가 스윽 하고 정겹다고 그새 추억이 된다.
오늘의 10만보,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 나도 이제 배우 ‘하정우’님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키득대며 집에 도착하니, 난 또 가족으로부터 ‘미친놈’이 되어 있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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