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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엄마 Mar 16. 2024

어느 교사의 고백

주말 오전엔 코가 꽉 막힌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도서관에 들러서 지난주 빌린 책을 반납하고 또 책을 빌려왔다. 유튜브 지식채널에 푹 빠진 첫째는 자연백과를 까막눈 둘째는 종이접기 책을 그리고 나는 <숲 속의 자본주의>라는 책을 빌려왔다. 도서관 내에 카페에서 간식을 먹으며 책 좀 읽다가 둘째가 참을성이 바닥나기 전 후다닥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늦은 아침 또는 이른 점심을 먹고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김수현이 나오는 드라마 <눈물의 여왕>을 넷플릭스로 보면서 빨래를 개고 침대에 누워서 밀리의 서재로 책도 읽고 낮잠을 좀 자볼까 하고 잠을 청했으나.. 둘째의 참을성이 또 바닥이 나서 거실로 강제소환되었다.


일거리를 절대 집에 들고 오지 말자는 주의인데 이번주는 그러지 못했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평가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지난주 내내 고민하다 결국 완성을 못해서 집에 들고 왔다. 첫째는 친구랑 놀이터 가고 둘째에서 태블릿 pc를 쥐어주고는 일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이번 1학기에는 '시 경험 쓰기' 수행평가를 해보려고 한다. 작년에 한 시 처방전 활동이 너무 좋았기에 시와 아이들의 경험을 엮는 활동을 더 해보고 싶었다. 수행평가를 하기 전 밑작업으로 요즘 아이들과 열심히 시를 읽고 있다.

지난주에는 '그 한마디의 말(김장호)과 '동해바다(신경림)' 두 편의 시를 읽고 그중에 한 편을 골라 관련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누가 발표해 볼까?' 하면 또 숨 막히는 적막과 치열한 눈치싸움이 펼쳐지는 것이 두려워 모둠별로 대화 나누고 가장 인상 깊은 발표를 해준 친구를 뽑아 전체발표를 하도록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살짝 서먹한 데다가 처음으로 하는 모둠활동이라 적당히 조용하고 질서 있게 대화가 이루어졌다.

우리 반에는 초등학교 시절에 백혈병을 앓았던 경험이 있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기 어려운 자신의 경험을 친구들에게 털어놨고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진 것이다. 전에 시 처방전 수업할 때도 느꼈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참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아이들은 의외로 쉽게 꺼낸다. 아니, 쉽게 꺼냈다고 할 순 없지만.. 아무튼  의외로 순순이 꺼낸다.

'헉 저런 얘길 한다고?' 속으론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지만 겉으로 티를 내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혹은 상처받을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그럴 수도 있지! 라며 태연하게 넘기느라 진땀을 뺄 때도 있다. 한편으론 '누구에게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라 그동안 혼자 많이 앓았겠지, 실은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겠지, 위로나 응원이 필요하기도 하겠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실 나만해도 학창 시절에 '부모님이 헤어지셨어', '엄마가 암에 걸리셨대.' 이런 말들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친구를 간절하게 바라기도 했다.  


사춘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나는 종종 나의 사춘기시절을 마주한다. 다 잊었다고 생각한 지난 일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느라 체한 줄도 몰랐던 그 일을 다시 소환하여 찬찬히 곱씹는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자주 느꼈던 감정은 '죄책감'이다. 모든 게 다 내 탓 같았다. 부모님이 헤어지신 것도, 엄마가 아프신 것도 결국 그렇게 영영 떠나신 것도.

학교에서 나와 닮은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그 시절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려준다. '그럴 수도 있다고, 그땐 나도 너무 어렸다고'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다 보면 명치끝에 걸려있던 일이 조금씩 나를 통과하는 것이 느껴진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이 어쩌면 내겐 숙명이었나 싶다.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시절 나를 만난다. 너무나도 괴롭고 아팠던 나의 10대를 돌아보고 그때의 나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지기 어렵다는 듯이 내 기억은 사춘기의 나를 자꾸 소환한다. 그러고 나면 지금의 평범한 일상과 나의 가족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올해도 학교에서 가정에서, 나의 역할에 충실하며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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