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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학급문고

by 슈퍼엄마

아이들에게 독서할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학교마다 도서관이 있지만 금쪽같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일부러 도서관을 찾아가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야 도서관을 찾겠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우리 학교는 아침 독서시간이 따로 있었지만 책이 없다는 핑계로 그 시간에 과제를 하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래서 책을 빌려오라고 도서관으로 보내면 책을 고르다 독서시간에 끝날 때가 되어야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고민 끝에 반 아이들에게 ‘학급문고’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이 환호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내 제안에 따라주었다.


우선 각자 책을 두 권씩 가져오라고 했다. 나도 학급문고에 기증할 책을 책장에서 골라보았다. 한 반이 35명이니까 2권씩만 해도 70권이고 내가 기증도 하면... 100권? 아마 그 정도면 훌륭한 학급문고가 될 거라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이 가져온 책을 보고 어이가 없고 실망스러웠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읽었을 법한, 수준에 안 맞는 책을 가져오는가 하면 너무 낡아서 너덜너덜한, 버리기 직전의 책을 가져온 아이들도 많았다. 아예 집에 책이 없다며 안 가져온 아이들도 많았다.

집에 읽을만한 책이 없다는 것이 나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 주위에 육아맘들이 열심히 전집을 사다 나르는 것들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가 어렸을 때는 전집부터 시작해 다양한 책을 사주는 부모들이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는 더 이상 책을 사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이에게 책 읽기를 위임하거나, 독서보다는 교과공부 쪽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나는 학부모님들께 학급문고를 만들려고 하는 취지를 설명드리고 아이들이 책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렸다. 그러나 학부모님들의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너무 좋다며 교사의 취지를 반겨주는 부모님도 계셨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님도 계셨다. 학부모님과 아이들의 독서의 대한 관심이 이 정도로 일 줄은 몰랐다. 학급문고 만들기는 시작부터 난항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몇몇 적극적인 아이들과 내가 사비를 털어 책을 구매했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첫 학급문고가 만들어졌다.


학급문고를 관리할 도서부장을 뽑고 학급문고 관리대장도 만들어 그럴듯하게 형식을 갖추었다. 시작부터 걱정이 많았지만 막상 만들어놓으니 예상외로 아이들의 반응은 좋았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어떤 책을 가지고 왔나 학급문고를 구경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특히 아침 독서시간에 ‘책이 없어서’ 못 읽는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자 다들 책 한 권씩 뽑아 들고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읽다가 재미없으면 바로 다른 책으로 바꿔보기도 수월했으니 30분 동안 10권 정도 책을 바꿔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책을 직접 선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겪는 시행착오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맞는 책을 탐색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침독서에 차츰 적응해 나갔다.


그러다 하나 둘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책을 관리하는 도서부장이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야 책 반납 안 한 사람 누구야??"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가는 학생들이 많아 지자 책의 행방을 찾느라 스트레스를 받는 눈치였다. 아이들 중에는 장부에 일일이 적기 귀찮아서 책을 안 가져가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느슨한 방침으로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출장부과 도서를 관리하기 쉽도록 책마다 라벨지로 번호를 붙였다. 그래서 장부에 책 제목과 저자를 다 쓰지 않아도 책 번호만 쓰고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책으로 가지고 가져가지 않고 교실에서 잠깐 보고 꽂아놓을 때는 굳이 장부에 기록하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도서부장의 부담도 줄이고 아이들도 손쉽게 이용하도록 했다. 학급 문고를 만들 때는 좀 느슨하게 관리해서 선생님도 아이들도 부담이 없어야 오래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급문고 성패의 가장 중요한 것은 책 목록이다. 학급문고는 보다 흥미위주의 책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의 책이나 만화책도 좋다. 아이들은 비슷한 또래가 주인공인 책을 잘 읽는다. 저희들 이야기 같아 공감이 되고, 감정이입이 되어 쉽게 읽힌다고 한다.

어떤 목적을 두고 읽기보다는 책을 쉽게 접하고 가까이하는 것이 의의를 두자. 교육적인 책을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서울대 추천도서', '000 권장도서'라는 이름을 단, 훌륭하지만 읽기 어려운 책들이 도서관에 많았다. 요즘은 아이들을 위한 '청소년 도서'가 많이 나온다. 현직 교사들이 아이들과 직접 읽고 추천하는 책 목록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아이들은 점차 자투리 시간에 학급문고를 이용해 책을 읽는 일에 적응해 나갔다. 10분, 20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어휘력이 늘어나니 읽을 수 있는 책이 더 많아졌다. 누군가 "저 책 정말 재밌어!"라고 말하면 서로 빌려보기 위해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읽을 순번을 정하기도 했다. 학기말에는 '학급문고 설문조사'라는 이름으로 반 친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책, 제목에 혹했다가 실망한 책, 친구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등을 조사해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아이들이 매우 흥미로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아이들이 책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책의 재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었다고.


특별한 학생만이 책을 좋아하고 잘 읽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게 읽은 책이 한 두권 늘어나고 즐거운 독서 경험이 생기면 누구나가 책을 즐겨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국어교사로서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기 위해 청소년 책에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읽기 시작했다.

아마 학급문고 만드는 일이 번거롭고, 아이들도 반기지 않는다고 포기했다면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독서수업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 책이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학급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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