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 사이엔 책이 있어

by 슈퍼엄마

교사 임용이 되고 4년 차가 되면 1급 정교사 연수를 의무적으로 받는다. 이 연수를 받고 나면 비로소 초보 교사 딱지를 떼는 기분이다. 연수는 여름방학 3주 동안 받게 되는데 여름방학이 통째로 날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싫지가 않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2년간 육아휴직을 한 후에 복직을 하고 맞이하는 연수였다. 그래서 더욱 휴가처럼 느껴졌다.


연수 프로그램 중에 가장 내게 와닿았던 것은 '비경쟁 독서토론' 수업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의 장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결국 나 혼자만 떠드는 강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한계가 느껴져 답답하던 차였다.

책을 읽고 나서 각자의 생각을 돌아가면서 말하는 것으로 끝나면 깊이가 없어 아쉬웠고 쟁점에 대해 찬반을 나눠 토론을 벌이면 승패가 나뉘는 것이 마음이 걸렸다. 그런데 그날은 독서 수업에 대한 나의 고민과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배우고 돌아왔다. 성의껏 도서 목록을 준비하고 학습목표와 수업계획을 세우고 비장한 마음으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내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고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내가 준비해 놓은 책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둠을 알아서 정하라고 했더니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저희들끼리 떠들거나 장난을 치려고만 했다. 토론 거리를 던져주거나 질문을 하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5분도 안 돼서 "토론 다 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잘 못하는 거지?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실망하고 좌절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날 이후에도 틈만 나면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독서 관련 연수를 열심히 찾아들었다.

그러다 <나의 책 읽기 수업>을 쓰신 송승훈 선생님의 '교사가 지치지 않는 독서교육' 연수를 듣게 되었다.

"독서교육은 교사가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독서교육이 일회성 활동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교사가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매우 와닿았다. 이벤트를 하듯 내가 모든 걸 준비하고 계획해서 아이들을 끌고 가려고 하면 결국 지쳐서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힘을 빼고 다시 수업을 계획했다. 책도 아이들이 고를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했다. 단, 아직 독서 수준이 낮거나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은 책을 고르는 것도 어려움을 느낄 수 있기에 다양한 목록을 제공하고 그중에서 고를 수 있도록 했다.

모둠을 만들 때는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리더십이 있고 독서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한 명씩 섞일 수 있도록 나의 의견도 함께 반영했다. 책을 읽고 나누는 질문들, 주제들 역시 아이들 스스로 고민하고 만들도록 했다. 내가 수업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이드만 제공할 뿐이었다.

이렇게 해도 되나? 그러다 수업이 산으로 가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서도 배울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밀고 나갔다.


중학교 3학년 남학생들에게 책처럼 의미 없고 따분한 것도 또 있을까? 그런 아이들에의 흥미를 끌기 위해 교육적이면서도 재미있고 호기심이 생길만한 제목의 책을 목록에 올려놓았다.

아이들은 성(姓)을 주제로 한 책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이 고른 책은 <십 대를 위한 사랑학개론>이라는 책으로 사이버성폭력, 연애, 짝사랑, 동성애 등 십 대 아이들이 궁금해할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책이었다. 실제 학생들의 고민 사연을 바탕으로 하여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책은 한 권을 다 읽는 것이 아니라 모둠끼리 상의해서 목차를 보고 읽고 싶은 페이지만 읽도록 했다. 아이들은 예상대로 자극적인 제목을 고르고 특정 페이지를 펼쳐서 저희들끼리 낄낄 거리며 웃고 있었다.

질문을 만들라고 했더니

"야동은 얼마나 보십니까?"

"여자 친구랑 스킨십은 어디까지 가능한가요?"

이러면서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한 모둠은 이성교제와 스킨십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책에는 임신한 고등학생 커플 이야기가 등장했다.

아이들은 대화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책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 또는 주변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는데 갑자기 한 아이가

"우리 누나는 고등학교 때 아이를 낳았어. 그 아이는 우리 부모님이 키워"라고 말했다.

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뭐라고 반응해야 하는지 딱히 찾지를 못해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그 후 아이들의 대화는 책임감 있는 이성교제에서부터 미혼모에 대한 사회의 시선, 편견까지 점차 확대되어 갔다.

그걸 옆에서 듣고 있는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너네들도 다 생각이 있구나..'

다른 모둠들도 비슷했다.

책 속의 이야기가 나의 일, 또는 내 주변의 누군가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그저 가볍고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그쳤을 그들의 대화는 책을 사이에 두고 한층 성숙해졌다.

단지 대화에 책이 끼어든 것뿐인데..


책 속의 이야기가 단지 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으로 옮겨왔을 때 책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그걸 아이들도 느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때 지치지 않는 독서수업의 가능성을 보았다.

굳이 내가 메시지를 전해주려고 힘들이지 않아도 아이들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

억지로 고삐를 쥐어 틀지 않아도 잘 따라와 줄 것이라는 믿음.

우리 사이에 책이 있으니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keyword
이전 04화책이랑 친해져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