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한국 대기업에서 일하는 청년, 예나 씨
예나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고등학생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학원에 다니는 그 모든 이유는 바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예나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찾아서 하고, 흥미 있는 NGO 기관을 직접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청소년 기자단 활동을 하고, 삶의 무기 하나를 얻기 위해 영어학원을 다녔다고 한다. 대학을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았던 예나 씨는 과연 어떻게 대학을 갈 수 있었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점점 더 그녀의 삶이 흥미로웠다.
선량 : 요즘 한국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수능을 준비한다고 해요. 고등학생이 되어 준비하면 이미 늦었다는군요. 저도 수능을 봤었는데요, 그게 참 뭐라고..... 그 하나만을 보고 달렸던 시간이 후회가 되기도 해요. 물론 수능을 잘 보진 못했지만요.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잖아요? ㅎㅎㅎㅎ
모두 수능을 향해 달려가는 무리에서 예나 씨는 살짝 빠져나온 경우인데요, 어떻게 보면 독보적인 경우가 아닌가 싶네요. 그만큼 두려움도 컸을 것 같아요.
예나 : 다행인 것은 제가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두려움보다는 설레는 감정을 더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학교 밖에서 지냈을 때도 가끔 두려움은 있었지만, 설렘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선량 :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인드셋이 굉장히 긍정적이었군요. 사실 두려움과 설렘은 같은 감정에서 시작한다고 하더라고요. 부정적인 방향으로 가면 두려움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면 설렘이라고 하더라고요.
여기서 가장 궁금한 게 있는데요, 대학은 어떻게 가셨나요?
예나 : 저는 수능을 보지 않고 대학에 갔어요.
선량 : 수능을 보지 않고도 대학에 갈 수 있나요?
예나 : 네 ㅎㅎㅎㅎ
사실 대학에 대한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고등학교를 안 가고 탈학교를 했을 때는 부모님의 영향이 좀 컸었는데요, 대학을 결정할 나이가 되었을 때는 제가 주도적으로 생각을 하던 때였거든요. 근데 도저히 대학은 모르겠는 거예요. '대학을 가지 말아야 하나? 대학을 안 간다면 뭘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했었죠.
그러다 대학에 갔는데요, 안동에 있는 대학의 "유럽문화관광학과"에 입학했어요. 사실 학교가 시골에 있는 지방국립대학인데요, 저는 학교 보다도 학과를 보고 갔어요. 학교만 봤다면 너무 작고 지방에 있어서 아마 못 갔을 거예요.
당시에 저희 부모님께서 서울에 있는 집을 모두 정리하시고 영주로 내려가셨는데요, 마침 대학이 있던 안동과 영주가 가까웠거든요. 그래서 부모님 곁에 더 지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지원을 했죠.
선량 : 수능을 안 보고 어떻게 가신 거죠?
예나 : 그 학교가 수능이 아니라 토익점수만 보는 학교였어요. 제가 탈학교를 시작할 때 내 삶에 무기 하나를 위해 영어공부를 선택했다고 했었잖아요. 그게 맞아떨어진 거죠. 저 진짜 영어 공부만 했거든요. 지원자격도 맞고, 과도 재밌을 것 같아서 가게 되었어요.
선량 :와.... 정말 삶은 알 수 없는 것 같네요. 요즘 학생들은 인서울 또는 경기도권의 대학만 가려고 한다던데, 예나 씨는 학교가 아니라 학과만 보고 딱 결정을 하셨군요. 그런 결정을 응원해 주신 부모님도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예나 : 너무 재밌었어요. 그리고 자랑 아닌 자랑인데요, 제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사실 다른 친구들이 공부를 안 하기도 했고요. 저는 공부도 너무 재밌었고, 학회 동아리 들어가서 관광학회 같은 데서 발표도 하고, 상도 타고 했었어요. 그런 모든 활동이 너무 재밌었고, 좋은 경험이어 되었어요.
선량 : 사실 저희도 제 아이들이 좋은 대학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맞는 학과를 찾아서 가길 원하거든요. 그게 지방대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지방대로 가서 장학금 받고 다녔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는데 예나 씨가 그러셨군요.
그럼 대학 졸업 하고 밀라노로 오신 건가요?
예나 : 대학 졸업하고, 경주에 하이코라는 컨벤션 센터에서 10개월 정도 일을 했어요. 그 후에 밀라노로 왔습니다.
선량 : 밀라노 대학원에서 전공은 뭔가요?
예나 : 호텔관광경영이에요. 조금 다르지만 큰 범위 안에서는 같은 분야죠.
선량 : 밀라노에서의 공부는 어땠나요?
예나 : 학문적인 건 비슷하지만 분위기가 한국과 많이 달랐어요. 한국은 교수님이 앞에 있고, 학생들이 교수님을 바라보면서 교수님이 하는 말을 받아 적는 분위기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교수님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면 학생들이 끝까지 질문을 해요. 한 번은 한 학생이 20분 동안 교수님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하면서 잡고 있는 경우를 봤어요.
"저는 이거에 동의하지 않는데 교수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말하면요, 교수님께서
"그 부분은 이렇게 저렇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계속 토론을 하는 거예요. 그 교실에 학생이 70명 정도 있었거든요. 근데 다들 그러려니,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교수라는 위치가 권위적인 반면 이곳에서는 교수가 내 학습과 공부를 도와주는 파트너로 인식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내 공부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 정도로 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한국과의 학습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선량 : 우리나라와 정말 다르네요. 우리나라에서 그러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할 것 같은데요? 아니면 다른 친구들이 수업 진도 안 나간다고 컴플레인하지 않을까 싶네요. ㅎㅎㅎ
얼마 전에 대학원을 졸업하셨는데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나요?
예나 : 있었어요. 대학원 졸업할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런데 아직 일을 구하지 못했을 때도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여기서 좀 더 도전해보고 싶었고요, 다른 나라에 지원을 해서라도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더 머물고 싶었어요. 부모님은 너무 힘들면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근데 제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죠. 그러던 찰나에 대학원 졸업하기 전에 취업이 되어서 지금 감사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저도 더 성장하고, 일도 더 배워서 더 힘들면 들어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선량 : 부모님께서는 그런 예나 씨의 결정을 존중하고 응원해 주시겠지만, 한 편으론 멀리 있는 딸이 너무 보고 싶을 것 같기도 하네요.
회사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요?
예나 : 저는 기획팀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어요. 기획팀이 CFO 관활이라서 회사의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알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알아야 할 것도 많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아요.
선량 : 일은 재밌나요?
예나 : 이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요, 일 자체는 잘 모르겠지만, 일을 배우는 건 재밌어요. 제가 아직은 인턴이라서 일을 주도적으로 하진 않거든요. 배우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선량 : 회사에 안 나가는 날 틈틈이 이탈리아 여행 다니는 모습을 보았어요. 너무 좋아 보이더라고요. 밀라노 삶의 만족도가 높은 편인가요?
예나 : 만족도가 매우 높아요. 근데 저는 지금까지 제 삶의 만족도가 항상 높았어요.
선량 : 와! 자존감이 장난 아닌데요? 부러워요.
예나 : 그러니까요. ㅎㅎㅎ 제가 좀 자존감도 높고, 만족도도 높아요. 가끔 힘들고 현타가 올 때도 있는데요, 그 시간이 오래가지 않아요. 다시 좋은 걸 생각하면서 금방 털고 일어나는 것 같아요.
선량 : 혹시, 한국에서 탈학교를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예나 : 음.... 좀 어려운데요. 어린 시절의 저에게 말한다고 생각하면,
"지금은 힘들 수 있지만,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았으면 좋겠어. 결국 그 긴 시간이 나를 만들어 가는 시간인 거잖아. 특히나 학교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주도적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일 텐데, 그 과정은 오로지 너를 위한 거고, 너에게 집중하고, 네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고 싶어요.
선량 : 너무 멋진 말이네요.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위해 선택하라는 말.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이다 보니, 부모님의 마음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반적인 부모님이라면 딸에게 고등학교를 가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해보라는 말, 절대 못하거든요. 그리고 끝까지 딸의 결정을 믿어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싶어요. 예나 씨의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와 자기 주도적인 삶이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예나 : 조금 시상식 맨트 같긴 하지만, 말씀하셨듯이 지금의 저를 만든 건 부모님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의 넓은 마인드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제가 아닌 또 다른 제 모습으로 살고 있겠죠. 그거에 저는 너무 감사하고, 또 저를 항상 존중해 주시고 좋은 교육관을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선량 : 예나 씨는 이탈리아 여행을 굉장히 많이 다니시는데요, 지금까지 가본 이탈리아 도시 중에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나요?
예나 : 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라벤나(Ravenna)라는 도시예요. 도시 전체가 모자이크 도시예요. 굉장히 작은 마을이지만, 그 마을의 가치는 굉장히 크다고 봐요. 비잔틴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거든요. 꽤 오랫동안 수도였다고 해요. 그래서 동서양의 문화가 섞여 있는 마을이에요.
선량 : 저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도시인데요,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토스카나, 시칠리아 등 유명한 도시도 좋지만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도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 같아요. 기회가 된다면 가족들과 함께 꼭 방문해보고 싶네요.
지금은 한국 대기업에서 인턴으로 일을 하고 계시는데요, 사회 생활은 또 다른 영역이죠. 분명 힘든 일도 많이 있을 거에요. 그럼에도 예나 씨는 높은 자존감을 장착하고 긍정파워로 잘 이겨낼 것 같네요.
제 기준으로 봤을 때 예나 씨는 아직 한창 나이거든요. 너무 좋은 나이인 것 같아요.
밀라노에서의 이 시간을 정말 즐겁게,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랄게요.
긴 시간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름방학인 두 아이가 온종일 집에 처박혀 뒹굴거린다. 날이 너무 덥다며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는 한숨을 쉬다가 수학 문제라도 좀 풀자고 말해보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다 예나 씨를 떠올렸다.
그래, 자기들이 필요하다 생각하면 공부하겠지.....
내가 잔소리해봤자 귀에 들리지도 않겠지.....
그저 아이들을 믿어주고, 잘 기다려주고, 지지해 주고.....
곁에서 햇살 같은 엄마가 돼 보자고 다시 한번 굳게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