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몇 년 전, 프랑스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환경을 비교 분석해 놓은 EBS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 나온 프랑스 아이들은 친구들을 배려하고 있었고, 자기 일은 스스로 했으며, 먹기 싫은 음식(야채 같은)도 억지로라도 먹고 있었다.
아이들을 훈육하는 엄마들의 방식은 단호하고, 일관성이 있었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기다려주었다. 나중에는 한국 아이들과 프랑스 아이들의 학습상태를 비교한 부분이 나왔다. 단연 한국 아이들의 수학적, 언어적인 점수가 월등하게 높았다. 하지만 창의성이나 협동성에 대해서는 프랑스 아이들이 월등하게 높게 나왔다.
그 프로그램의 취지는 아마도 프랑스 부모들처럼 아이들에게 단호하고 일관성 있게 교육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기다려준다면 한국 아이들도 창의력과 이해력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 프로그램을 본 후, 프랑스 아이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프랑스 부모들처럼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키워보리라 다짐했었다.
2년 전, 내 아이들이 다카 프랑스 학교에 처음 갔을 때, 그 학교에는 프랑스 아이들이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프랑스권 아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일본, 중국 아이들이 월등히 많은 수를 차지했다.
지안이 반에는 소수의 프랑스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2명은 여자아이였다. 그 두 아이들은 같은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었는지 단짝 친구였다. 문제는 그중 한 아이는 유명한 말썽꾸러기였고, 다른 한 아이는 지안이의 담임선생님 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지안이가 속상해하며 말을 했다.
"엄마 자꾸 엘레나랑 베티가 내 간식을 말도 없이 가져가 버려. 오늘도 간식을 하나도 못 먹었어."
"네가 준 게 아니라 말도 없이 그냥 가져갔다고?"
"응,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어가 버렸어."
분명히 티브이에서 본 프랑스 아이들은 배려심이 있고 절대 친구들에게 함부로 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계속 일어났다. 결국 난, 아침 등교 시간에 지안이 담임선생님에게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들이 지안이 간식을 허락도 없이 먹어버려서 지안이가 간식을 못 먹는다고 해요."
"아 그래요? 그 친구들 이름을 알려줄 수 있나요?"
"엘레나와 베티라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선생님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아, 알겠어요. 주의시켜야겠네요."
그 뒤로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간식을 서로 나눠먹을 수 없다는 규칙.
그리고 베티가 선생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딸의 엄마에게 그 딸의 잘못을 일러바친 꼴이라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내 아이를 위한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두 아이는 그 뒤로도 계속 말썽을 부렸다. 특히 엘레나는 반 친구들을 돌아가며 골탕 먹이고 함부로 대하곤 했는데, 그 뒤로 모든 프랑스 아이들이 다 배려심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지금 뭄바이 프랑스 학교에는 아시아권 아이들이 별로 없다. 특히 지안이 반에는 지안이 혼자 아시아 출신이고 대부분이 프랑스 아이들이다. 지안이 반에서 가장 말썽꾸러기는 무시타파 그리고 옥성스라는 아이이다. 무시타파는 과잉성 행동장애를 가진 아이라서 학기 초에 꽤 어려움을 겪었다. 수업시간에도 자주 말썽을 일으켰고, 종종 도시락을 바닥에 떨어뜨려 엉망이 되었으며, 친구들을 괴롭혀 힘들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행동이 꽤 좋아져서 여자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특히 유치원생 동생들과 잘 놀아준다고 한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는데 지금은 간단한 영어로 대화도 한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발전이다. 반면 옥성스는 학기 초에는 그저 얌전한 아이였다. 하지만 요즘은 거의 날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선생님에게 혼이 난다고 한다.
"엄마, 어제는 옥성스 잘못도 아닌데 선생님이 옥성스한테 화를 냈어. 그래서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분명히 옥성스가 잘못한 게 아니었거든. 선생님이 이상해. 자꾸 옥 성스한테만 화를 내. 너무 공정하지가 않아."
지안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너무 자주 말썽을 일으키다 보니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님에도 선생님은 그 아이를 혼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아이는 지안이 같은, 자신보다 조금 약해 보이는 아이들을 찌르거나 꼬집어서 말썽을 일으켰다.
아침마다 옥성스를 학교에 바래다주는 사람은 그의 아빠이다. 옥성스의 아빠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아이가 뭔가를 하면 끝까지 기다려 주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옆에 앉아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의 아빠를 보았다. 하루는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고 있는 아이에게 옆에서 빨리 달라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주기를 기다려주는 모습도 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반에서는 말썽을 가장 많이 부린다고 하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부모님의 양육 방식을 알 수는 없지만, 역시나 모든 프랑스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일을 하고, 남을 배려한다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소은이 반에서 가장 말썽꾸러기는 로흐라는 여자아이이다. 로흐의 엄마는 전형적인 프랑스 사람이다. 즉 행동과 목소리가 매우 우아하다. 조근조근 속삭이며 말하고, 발걸음도 사뿐사뿐 하다. 그녀를 보며 전형적인 엘레강스한 프랑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딸 로흐는 쉬지 않고 조잘조잘 말을 한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쉬지 않고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가끔 교실문을 잠가버려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고, 수업시간에 드러눕고 말을 듣지 않아 선생님의 뚜껑이 열리게 만든다. 며칠 전에는 반 아이들을 손톱으로 긁어 상처를 입혀서 교장선생님에게 불려 가 처벌을 받기도 했다. 다들 우아한 엄마와 왈가닥 딸을 보며 이해가 안 된다고 머리를 흔든다.
배려심이 넘치는 아이들도 있다. 지안이 반의 벱티스트는 그중에 가장 친절하고 약한 아이들을 잘 도와주는 아이인데, 지안이도 그 친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소은이 반에도 그런 아이가 있다. 젠틀한 신사 같은 알렉은 아침마다 자기 동생에게 스위트 한 볼뽀뽀를 해준다. 길을 걸을 때 꼭 동생 손을 잡아주기도 한다. 반에서도 친구들에게 절대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아이들은 티브이에서 본 바로 배려심 넘치는 프랑스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직접 프랑스 아이들을 겪어보니, 이 아이들도 여느 나라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 부모의 육아방식과는 상관없이 그저 아이들일 뿐이었다. 그 아이의 성향에 따라 어떤 아이들은 왈가닥이고, 어떤 아이들은 배려심이 넘치고 또 어떤 아이들은 부끄러움이 많다. 아이들이 점점 더 자라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유치원생과 초등 저학년 아이들은 한국 아이나 프랑스 아이나 비슷했다. 그냥 아이들일 뿐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의 양육방식이 그저 좋아 보이기만 했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그 모습이 전반적인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방식을 따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난 내 방식대로 아이들을 양육하기로 했다.
태어난 지 한 달 뒤부터 수면교육을 하고, 잠자리를 따로 쓰고, 가끔 아이들을 베이비시터에게 맞기고 부부만 외출을 하는 그들의 방식을 난 따라 하지 못한다. 난 여전히 아이들과 같이 잠을 자고,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어줘야 하며, 아이들을 낯선 사람에게 맞기고 부부만 외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됐던, 내 두 아이가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진 않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이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저 아이들일 뿐이다. 그저 아이들의 성향이 다를 뿐. 그것으로 한국 아이들은 어떻고, 프랑스 아이들은 어떻다고 일반화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의문이 든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그 부모의 양육 방식에 따라 아이들의 모습도 변할 것이다. 그때는 배려심 넘치는 프랑스 아이들을 더 많이 만나 볼 수 있을까?
그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아이들은 나라나 국가와 상관없이 그저 아이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