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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Oct 01. 2021

행복의 밑장은 빼지 않기로 했다

불행을 점치는 동작 그만,



  “여기 언니는 작년에 회사 어떻게 다녔대? 꽤나 고생했겠네.” 


  대충 보는 줄 알았는데 좀 용하네, 이런 걸 운세 맛보기라고 하는 건가. 정작 돈을 지불하고 앉은 친구를 옆에 두고 한창 사주풀이를 하다 말고 나의 음력 생일과 난 시를 묻더니 대뜸 던진 말이었다. 시답잖은 소리였다면 그냥 흘렸겠지만 작년은 실제로 유난히 안 풀리던 한 해였던 탓인지 그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렇게 홀리듯이 계획에도 없던 직장 운을 봤다. 어차피 미신이니 속는 셈 치고 들어 보자 했는데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 몇 마디 문장으로 내 지난 일 년을 정리해 버렸다. 더불어 아직 오지 않은 날까지 더해 마치 인생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내려다보듯 말했다.

 


  “아등바등 살아내려 365일 꼬박 버텼는데, 그 시간을 단 몇 마디로 정리해 버리네.”


고작 두세 마디로 정리될 시간을 괜히 애쓰며 살았나 싶은 생각에 가게를 나서며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늑장 부리거나 거들먹거리며 어기적거렸어도 결국 이렇게 됐을 운명이라면…. 어차피 정해진 인생 너무 열심히 살았나 싶어 살짝 억울하기까지 했다.







정말 작년 한 해 평생 쌓아 올린 자존감이 곤두박질쳐, 지하 6층까지 꺼질 정도로 힘든 직장 생활을 해야 했다. 짱짱하던 마음은 볼품없이 찌그러졌고, 마치 회생이 어려운 폐기처분 직전의 재활용 불가 판정을 받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내려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은밀한 속을 꺼내 보인 듯한 기분이었다.

 


  지난 시간을 읽기 쉬운 책처럼 술술 읽어버리는 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을 용케 알아차리고 그에 대한 풀이를 해줄 때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해서 아주 잠깐 시원하기도 했으나, 잘 알지도 못하는 이가 점치는 사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질 정도로 용하다고 생각하니 너른 바다쯤 되는 줄 알았던 세상이, 동네 횟집에 있는 수족관보다 작게 느껴졌다. 아무리 헤엄쳐도 결국 가두리 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기분전환이 되기는커녕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려 친구와 헤어지자마자 이어폰부터 꼈다. 아무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친구는 자기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맞추는 족집게 같은 실력에 반했는지 달리던 버스가 빨간 신호에 멈춰 섰을 무렵, 저 집 정말 용한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인생을 점치는 일을 두고 아주 용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걸까. 흔히들 쓰는 '용하다'는 말 하나에도 입안에 모래알을 물고 있는 것처럼 꺼끌대는 것을 보니 그 말이 마음속 무언가를 건드린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용하다는 것은 재주가 뛰어나고 특이한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미래를 점치고 남들의 지나온 시간을 단숨에 풀이하는 일만큼 그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 영험한 이의 말에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머리의 생각이고, 마음은 이상하게 내내 불편했다.



  짐작할 수 없는 미래를 굳이 점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용하다고 해도 가보지 못한 미래는 세상 모두에게 미지수였다. 용하다는 누군가가 훗날을 귀띔해주더라도 정말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든다. 그가 진짜 용한지 아닌지는 그 미지의 때를 겪고 나서야 알 수 있는데, 세상 어느 누구도 미래를 먼저 경험할 수 없으니 그의 재주는 조금 예리한 짐작에 불과한 셈이다.




설사 그가 아무리 용하다고 한들 그의 몫은 결말을 점치는 것이 전부였다. 개중에는 그래도 힘든 거 많이 벗어서 앞으로는 좋을 거다, 라는 듣고 싶던 문장도 있었지만, 이미 정해진 점괘를 피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해야 그 결말에 더 빨리 닿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용해도 50대 50으로 점쳐지는 결말만 있었다.  분명 나의 미래를 점치는 그의 말속에 원하던 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그가 하는 이야기에는 클라이맥스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말뿐인 이야기에는 클라이맥스가 없다. 그러니 원하는 대답을 듣고도 시시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 결말로 가는 위기나 절정을 마주하고 살아내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결말이 행복으로 가 닿을지, 불행으로 기울지 용케 맞춘다고 해도 세상일이라는 것이 딱 잘라 설명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는다 해도 그것을 불운하다 단정 짓기 어렵고, 반대로 행복한 결말이라도 마음이 곤할 수 있다. 불운한 시기를 이겨내면서 뜻밖의 배움이나 지혜를 얻기도 하는 세상은 요지경이기 때문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인생의 결말이 궁금해서 끝부분만 미리 점쳐본다고 한들, 그 결말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내 지난 시간을 속독해버린 것보다 더 불편했던 것은 용한 그 상대방이 읽어주는 점괘를 가지고 앞으로의 삶을 긍정할지 말지 결정하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용하다는 그의 점괘가 부정적이었다면, 마음도 덩달아 불행을 학습했을 것이 뻔해서 내 마음에게 미안해졌다.



되돌아보면 나는 유독 불행에 대해서만 용하게 굴었다. 간절히 원했으나 이루지 못한 결과 앞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라며 그간의 노력을 절하했고 나조차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닥친 불운을 두고도 내 이럴 줄 알았다, 라며 앞으로의 모든 불행을 모두 꿰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무질서하게 오가는 것들 이건만, 불행한 것들만 모아  일렬 주차하듯 늘어놓는 일에만 용하게 굴었으니 행복이 자리할 틈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단 한 번도 스스로 행복을 점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의 인생에게 영험한 존재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일평생 한 번도 나를 곁에서 본 적 없는 생판 남의 입을 통해 내 인생을 점칠 바에는, 허투루 넘겨버린 시간을 다시 정독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삶의 클라이맥스에 대비하는 것이 나았다.




  당장 오늘 일도 점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흔들릴 때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침묵인지, 위로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가장 먼저 알아차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따금씩 스스로가 완벽한 타인 같고 세상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존재처럼 멀어도, 그 미세한 마음의 소리까지 듣게 될 것 또한 나였다. 결국 남이 하는 말보다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 당연한 이치를 깨닫지 못해서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닫았고 습관처럼 불행을 점쳤다. 행복이 찾아와도 그 감정은 이내 그치고 말 소나기 정도로 여겼고, 아직 오지도 않은 날까지 더해 섣불리 실망했다. 무턱대고 열심히만 살면 안 되고 잘해야 된다며 더 분발하지 못하는 마음을 몰아세웠다. 서러운 마음이 소리를 죽이고 어둠으로 기우는 줄도 모르고, 역시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다며 갖은 불행에 대해서만 용하게 굴었다.



  아등바등 살아내려 꼬박 노력했던 나의 일 년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정리되고, 그가 꺼내는 몇 마디 문장으로 굳건했던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에게 애틋해졌다. 이제 더는 나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점쳐달라고 맡기지 않으리라. 미래를 읽어내는 이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않으리라.



설사 잠시 불운의 그림자가 깃들어 어둠이 짙어진다고 해도, 곧 좋아질 거라고. 누구에게나 문제는 항상 있고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고. 그러니 다가올 행복에 두 팔 벌려 서 있으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내 편이 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행복을 점치는 믿음직한 마음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행복의 밑장을 빼고
불행을 점치는 동작은 그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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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쟁이캘리




산다는 건 어쩌면 끝 모를
등반의 여정일지도 몰라


오름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험준한 길이 있으면 쉬어가는 터도
가문 목 축일 시원한 계곡도 있겠지


내 가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
끝이 어딘지 알 순 없어도, 돌아보면
나 말고도 많은 생(生)들이 정상을 향한
등반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지


삶은 매일이 초행이라
작은 돌부리에도 휘청일 때도 있지
앞만 보며 가다가도, 문득 뒤돌 때
한 마디 위로면 충분했는데 너는
말없이 나를 위로 떠밀더라


어릴 땐 높이 나는 게 꿈이었건만
예고 없이 오른 허공은 발 디딜 틈도 없어
허우적대는 발버둥만큼이나,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우두커니 견뎌야 할 외로움이더라


위로, 또 위로 오르던 가파른 언덕은
가히 내려다보기도 아찔한 드높은 절벽이고
자유 낙하하듯 하늘에 몸을 던지는
어릴 적 동심으로 간절히 바라던 일은
이제와 보니 상상할 수 없는 고독이더라


그대, 산다는 건 어쩌면 끝 모를
등반의 여정일지도 모르니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되어주고
험준한 길이 있으면 쉼터가 되어주는
가문 목 축일 시원한 계곡으로 있어주기를


내 가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
끝이 어딘지 알 순 없어도, 돌아보면
많은 생(生)들이 함께 정상을 향한
등반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기를


삶은 매일이 초행이라
행여 작은 돌부리에도 휘청일지라도
그대 문득 뒤돌 때, 혼자가 아니므로 부디
말없는 위로가 되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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