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나쁜 것도 아닌데 인상 쓰며 멀리하는.
가세가 기울면서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고부터 나의 등굣길 차림새는 빈곤해졌다. 옷매무새가 해지거나 헐거운 옷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골라준 옷을 입고 온 아이들의 차림새는 겉모습부터 달랐다. 머리카락 한올까지 빠짐없이 단정히 묶은 아이들의 품새는 아무리 애써도 서투른 탓에 묶은 머리가 자꾸만 삐져나오는 나랑은 분명 달랐다.
I.M.F는 대한민국 전체의 위기라고 했지만 마흔 명 남짓한 교실 안에서도 그 불행을 비켜간 아이들이 있었다. 뇌성마비 절름발이 신세인 나를 쉬쉬하며 은근히 따돌리던 아이들은 나의 옷차림이 남루해져 가는 속도에 맞춰 더욱 멀리했다. 그때만 해도 반 아이들 대부분이 동네 친구라 한 집 건너 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검은 양복 무리들이 붙이고 간 빨간딱지 때문에 아빠의 사업 부도는 동네방도 소문이 퍼졌다. 부도가 뭔지 모르는 아이들은 서로 그 말의 의미를 묻다가 잘 모르지만 안 좋은 일 아니냐며 슬금슬금 내게서 멀어졌다. 아마 불행도 전염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자기 몸이 내게 닿을까 조심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당연하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습관처럼 외로워지기 시작하면서 종종 엄마의 온기가 그리웠다. 오늘은 비 예보가 있으니 우산 챙기라는 말을 듣고도 일부러 빈 손으로 등교하기도 했다. 하굣길 비 맞고 집으로 돌아올까 걱정 돼 귀가 시간을 앞당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청개구리처럼 굴었다.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학교가 파하기를 기다리는 어른들 사이에 우리 부모님 얼굴은 없었다.
외벌이가 보통이던 시절,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못마땅해 밥을 굶어보려고도 했지만, 그 당시 텅 빈 집안에서 엄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부엌 식탁이 유일했다. 밤늦은 귀가시간 전까지 행여 오빠와 내가 배를 곪을까 걱정돼, 잔뜩 튀겨놓고 나간 돈가스나 한 솥 가득 끓여놓은 돼지김치찌개에서 그리운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늘 돼지김치찌개를 끓여놓으면 고기는 오빠가 다 골라먹고 너는 국물만 먹는다며 애달파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막 데워 따뜻한 국물에 먼저 손이 갔다. 아마도 나 홀로 밥상을 차려먹으며 그렇게나마 바닥난 온기를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가 출근하기 전 만들어둔 음식은 부재의 상징 같아서 달갑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반겼던 것이 김밥이었다. 주로 학교에서 소풍을 가기 전 날 미리 싸주셨는데, 김밥은 엄마가 맞벌이를 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싸 오는 음식이었다. 소풍을 가서 김밥을 먹을 때만큼은 차별 없이 모두가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더구나 그때는 나와 거리를 멀리하던 친구들도 내 도시락에 관심을 보였다. 엄마는 내 입 크기가 작은 것을 고려해 항상 작게 김밥을 말아주시고는 했는데, 성인 입 크기에 맞춰 먹을 때마다 풀어헤쳐지는 자기들과 다르게 한 입에 쏙 넣는 것이 부러웠는지 금세 주위로 아이들이 몰렸다.
한 개만 먹어봐도 되느냐며 포크를 갖다 댄 아이들은 꼭 흔적을 남기고는 했는데, 그건 바로 김밥 속에 있던 시금치였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에 만족하다가도 이상한 식감의 시금치를 먹자마자 얼굴을 찡그렸고 그 표정을 본 아이들은 하나같이 포크로 시금치를 골라내고 먹었다. 크기는 만족스럽지만 예기치 못한 식재료가 별로였는지, 나를 둘러싼 무리가 하나둘씩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덩그러니 혼자 남아 도시락 통에 널브러진 시금치를 보니 내 신세가 꼭 김밥 속 시금치 같았다. 제 몸에 나쁜 것도 아닌데 인상을 찌푸리며 멀리하는 것이 꼭 나와 닮아 보였다.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에 앉아 남겨진 시금치를 먹으며 뽀빠이처럼 몸이 건강해지기를 바랐다. 허투루 먹으면 효험이 없을까 봐 꼭꼭 씹어 삼켰다.
그때는 꼭꼭 씹어 삼킨 시금치가 씨앗처럼 뱃속에 심겨 단단한 나무로 자라는 줄 알았다. 그렇게 쉬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나무가 자라면 한쪽으로 기울어 절름발이로 걷는 걸음의 수평이 맞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금치를 즐겨 먹는 뽀빠이의 울그락불그락한 근육이 시금치 나무가 맺은 열매라고 믿었으니 나에게 시금치가 가지는 의미는 나물 이상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종종 집에 식재료가 남았다는 이유로 김밥을 싸들고 손수 배달을 오신다. 엄마의 김밥에는 바깥에서 사 먹는 것과 다르게 꽉 차게 배부른 든든한 기운이 있다. 김밥 한 알에 담긴 정성에 대해 생각하다, 엄마가 나에게 싸주던 김밥은 내 건강에 대한 염원이었음을 알았다.
핸디캡을 가진 자식을 둔 엄마들의 소원이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이듯.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부침 없이 강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꼭꼭 씹어 잘 소화해 내라는 응원을 돌돌 말아 만든 김밥이니 허기가 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날의 꿈처럼 뱃속에 담긴 시금치는 씨앗으로 심기지도, 나무로 자라지도 못했다. 뽀빠이 근육처럼 튼튼한 몸도 갖지 못한 채 여전한 절름발이 신세로 살아가는 중이지만, 변함없이 나의 건강을 염원하는 엄마의 김밥 배달은 계속되고 있으니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단단한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는 시금치를 빼놓고 먹지 않는 것이 튼튼한 다리를 갖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나의 오랜 안녕을 기원하는 엄마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소풍 갔다 돌아와, 늦은 밤 엄마가 귀가한 줄도 모른 채 곤히 잠든 내 가방 안의 빈 도시락만큼이나 꽉 찬 행복이 또 없었을 테니 말이다. 텅 빈 것으로 꽉 찬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만큼 매혹적인 역설이 또 있으랴.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운 도시락으로 엄마의 온기에 화답하며 배 불린 덕분에, 여전히 채우지 못한 빈곤한 육체라도 마음만은 어느 누구보다 든든한 기운 가득하게 불린 것 아니겠는가.
남들보다 일찍 부모님의 맞벌이를 경험하고 풍족한 반찬으로 사랑의 은유를 깨치게 해 준 기억 덕분에,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고 어느 것이 텅 빈 듯 보여도 실상 그것은 꽉 찬 것이라는 역설을 온몸으로 깨쳤다. 그러니 당장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고 텅 비었다고 섣불리 슬퍼할 필요는 없다. 아주 잠시, 내가 보지 못하도록 눈이 가렸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남들은 인상을 쓰고 돌아서도 내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 옛날 엄마가 싸준 김밥처럼.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