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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Apr 09. 2020

깜냥스승|죽었니? 살았니?

아이에게 배우는 인생철학






나는 '죽음'하면 대표적으로 <아는 여자>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남주인공이 시한부 인생으로 착각하고 겪는 일들이 담겼다.

그중에서 영화 속의 전봇대 이야기는 황당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냥 남녀가 사랑하는 이야기인데 전봇대가 진짜 주인공이라니!

이런 색다름은 늘 죽음과 한 세트로 기억됐다.





<전봇대 이야기>

남녀가 자주 만났던 장소가 전봇대였다.
전봇대는 늘 남녀를 지켜보았다.
남자는 싸움으로 돈을 벌면서 둘은 결국 헤어진다.
하지만 여자는 매일 전봇대에서 기다렸고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 돌아가려다가 조직의 보복을 받는다.
여자는 기다리다가 전봇대에서 병으로 쓰러진다.
심하게 다친 남자는 근처 전봇대를 붙잡고 마음을 전한다.
그러자 불꽃 튀는 전깃줄이 여자가 있는 전봇대까지 전달된다.
이야기는 역시나 당황스러운 재미가 있다.





전봇대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항상 그 자리에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무엇을 말한다.

그것은 내가 사는 동안 고슴도치처럼 이 땅에 꽂힌다.

살아간다는 것은 느리게 죽어가는 것이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변곡점마다 전봇대를 세우거나 전봇대가 되는 일을 반복한다.





아이에게 있어 나는 전봇대이다.

늠름하게 서서 빛을 밝혀주고 기댈 수 있는 전봇대이다.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는 존재들이 있다.

나에게 부모가 그러했고

자주 가는 단골식당이 그러했고

매년 피는 외톨이 벚나무가 그러했다.

그들은 나의 삶이 인스턴트가 아니라고 격려한다.

그들은 나의 삶이 수시로 변해도 전봇대처럼 변함없이 나를 위로할 것이다.

나는 이런 전봇대가 몇 개나 있을까?

없다면 오늘 전봇대 하나 꽂아보는 건 어떨까?





나에게 있어 아이는 전봇대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 죽고 사는 나의 이야기를 아이는 지켜보고 있다.

결국 때가 되면 내 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에서 전봇대를 매립할 것이다.

누군가의 전봇대가 되기는 쉽지 않다.

한결같아야 하고

의미를 지켜야 하고

때론 희생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전봇대일까?

없다면 오늘부터 누군가의 전봇대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죽음으로 물들 때까지 전봇대를 믿거나 누군가의 전봇대가 되어주는 삶을 살아간다.

아이의 '죽었니 살았니'에 나는 대답한다.



죽어간다~ 그래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 심기처럼 전봇대를 세운다~




이상 한국전력공사의 전봇대 꽂기 캠페인이었다.

'되어 주기'와 '되기' 를  실천하다보면 우울한 허무주의로 흐르진 않을 것이다.

남들이 나의 전봇대 세우기를 깎아내리는 평가에는 이렇게 말하라.



내가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성공한 사람들은 전봇대로 이를 쑤시다가 의미를 담은 곳에 척척 전봇대를 꽂는 거인이다.

#처음은 누구나 이쑤시개처럼 작은 전봇대로 시작한다.

#작은 전봇대라고 전기를 전달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이란 속 상하게 전봇대에 자꾸 노상방뇨를 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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