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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Dec 10. 2020

새벽 서리를 밟아보셨나요?

산책뒤끝記

새벽에 글을 쓰다 보면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생각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시점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노려본다. 

눈싸움마저 지기 전에 황급히 노트북을 닫는다. 

“탁”하고 울리는 소리는 언제나 경쾌하다. 

예전에는 의자에 오래 앉는 엉덩이 씨름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머리를 살살 달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부산을 떨며 겨울옷을 몸 위에 층층이 쌓았다.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 제1터널과 살이 에이는 찬바람 제2터널을 질주했다. 

그 터널은 매번 정체 구간인데 요즘은 시간대를 바꾸었더니 원활하다. 

겨울의 새벽은 새벽이라고 말하기가 이상할 정도로 밤과 똑같다. 

겨울에는 새벽도 밤이다. 

그래서 겨울밤은 길고 깊다. 

어쩌면 새벽은 밤이 무르익은 마지막 시간인지도 모른다. 

엉뚱한 생각을 즐길 수 있는 산책이 좋다. 





너른 하늘은 모든 색이 섞인 것처럼 짙었고 몇몇 점만이 여백의 미를 뽐냈다. 

난 적막한 공원을 뛰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든 마스크 덕분이다. 

좋은 핑계를 얻은 뱃살은 출렁이며 환호한다. 

배에도 마스크를 채우고 싶다. 

드디어 제대로 된 산책로가 시작됐다. 

그곳에는 늘 억새가 먼저 나와 있다. 

겨울에도 꼿꼿이 차렷 자세를 한 억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정돈을 시작한다. 

이 친구는 색다른 시간을 주어야 기분 좋게 청소한다. 

입김 탓에 마스크가 축축하다. 

차가운 몸을 대신해서 땀을 흘려주니 기특하다. 





공원은 내가 걸은 만큼 자연이 바뀐다. 

얼마나 담백하고 순수한가. 

변하는 배경을 감상하며 잠시 생각을 잊었다. 

어느새 하늘 끝자락은 열브스름해진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다. 

그때 나무 계단에 무언가 반짝였다. 

나도 모르게 다리의 시동을 껐다. 

수만 개의 조그만 보석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다채롭게 빛나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서리. 

그전에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서리를 본 적이 있던가? 

체에 걸리는 아름다운 장면은 없다. 

그저 겨울 길목에서 흔하고 당연하게 볼 수 있는 존재였었다. 

그런데 서리가 모여서 빛나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뛰었다. 

섞이지 않은 순수함을 표현하라고 하면 이 광경이 아닐까? 







곧이어 밟고 싶은 충동이 차올랐다. 

아마 인간의 호전성 탓이리라. 

다리에 시동을 켰다. 

마치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천천히 한 발씩을 옮겼다. 

바사악 바사악 소리에 찌릿찌릿 가슴이 울렸다. 

처음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의 <사과나무> 작품을 보았을 때 느꼈던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차리니 계단 꼭대기였다. 

커지는 아쉬움에 서리를 다시 보았다. 

한 번 더 밟을지 잠시 고민했다. 

참자. 

참아야 한다. 

지금 느낀 감동이 사라질까 두려워 얼른 집으로 뛰었다. 

생각만 정리하려고 했는데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았다. 

아직도 귓가에 바사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현관문을 열고 모자와 마스크를 벗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거울에 비친 앞머리에는 작고 하얀 얼음 알갱이가 맺혀있었다. 

서리야,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서리


당신이 모습 그대로 세상을 덮었기에


제가 순수純粹를 알게 됐습니다


차마 덮지 못한 곳은 제 몫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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