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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창고 Mar 05. 2021

새벽 인연因緣

산책뒤끝記

만남은 시작과 끝 그리고 다른 시작이라는 그릇 안에서
안정과 변화가 맛깔나게 버무려진다. 



만남은 모두 특별하지만, 새벽 산책은 특히 이채로운 만남을 주선한다. 

처음 마주하는 이는 언제나 나다. 

이불속에서 백만 가지 이유를 대는 나와 일어나려는 내가 만난다. 

오랜 진통 끝에 알을 갓 깬 병아리처럼 이불 밖으로 나온다.

나만 이기면 나머지는 비교적 자연스럽다. 

어린 시절 만화를 보면 어느 정도 성장한 주인공이 똑같은 능력을 갖춘 나를 마주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둘은 심하게 싸우지만 결국 주인공이 이기고 만다. 

지금도 웹툰에 등장하는 소재인데 나는 그때마다 같은 내가 끝판왕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낸다. 

나를 이기는 것만큼 소중한 승리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용한 새벽은 다음 만남을 이끈다. 

어둠 속 찬 공기에 익숙해지면 공원 앞 횡단보도가 보인다. 

이번에는 사회 속 규범과 마주한다. 

차가 잘 다니지 않는 하얀 무늬 길에서 난 흔들린다. 

건너? 기다려? 

그냥 건넌다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효율성이란 목표를 이루는 과정과 절차가 합리적인 것이다. 

적은 자원으로 빨리해내는 걸 말한다. 

길지 않은 시간자원을 생각하면 신호를 무시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하지만 효율성을 강조하다 보면 때때로 목표를 잊는다는 게 문제다. 

깨끗한 책상은 공부에 도움이 되지만 책상 정리에 몰두한다면 그날 목표치는 달성할 수 없다. 





반대로 신호를 기다리는 것은 효과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효과성이란 목표 달성의 정도를 의미한다. 

꼭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을 말한다. 

신호등은 산책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걷는 이유는 새벽 사색을 위한 것이다. 

방점은 사색에 찍혔다. 

발걸음의 목표와 이유를 떠올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사색이 핵심 목표라면 굳이 빨리 갈 필요가 없다. 

걷든 서든 사색은 계속되니까. 

나는 매일 같은 질문을 해주는 신호등이 좋다. 



해가 떠오르면 자연은 제각각의 자기 모습으로 바뀐다.



무사히 테스트에 통과하면 공원이 펼쳐진다. 

자연은 늘 나를 기다린다. 

볕이 쬐면 각각의 존재감이 드러나겠지만, 새벽에는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가 된다. 

그는 마치 거대한 생명처럼 숨을 쉰다. 

그리고 낯선 이를 매일 받아준다. 

나를 만나고 사회를 지나야 자연을 만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불규칙한 숨을 뱉으며 질주하다 보면 헝클어진 마음의 짐을 잠시 잊게 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격려하며 가까이 보이는 나무까지만 달리기로 자신과 약속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오랜만에 마주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마스크에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인적이 드문 공원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성에게는 경계 대상 1호다. 

게다가 속도를 보니 내가 걷기로 한 나무에서 그녀를 만날 게 분명했다. 

그곳에서 갑자기 느리게 걷는다면 잠시지만 그녀가 오해할 수도 있다. 

괜한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더 달리기로 했다. 

목까지 차오른 숨을 참으며 터질 것 같은 허벅지를 바삐 움직였다. 

마스크 탓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소심한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가볍게 지나치고 발소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한 뒤에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걸으면서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산책에 좋은 기억만 간직할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 새벽 산책에는 누구를 만날지 설렌다. 

어쩌면 새벽 소풍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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