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아무리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이사 준비, 결혼식 준비, 바빠지는 회사 업무까지. 9월의 시작과 함께 한정된 시간 속 수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 섰다.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미션 마무리하듯 보내는 시기가 시작 된 것이다.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을 포함해 함께 살게되는 순간까지의 일종의 <장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 마치 시간을 거슬러 수능을 앞둔 수험생처럼, 하루하루 결혼식 날짜는 다가오는데 무언갈 부지런히 해도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지속되었다. 쫒기는 듯 지내는가 싶다가도 잠시 멈춰 즐기려 하면 왜인지 모르게 큰 시험을 앞둔 것 처럼 몸은 쉬지만 마음은 온전하게 쉬는게 뜻대로 되진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더더욱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던 터.
D와 나에게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란, 최소한 아프리카로 떠났다 돌아올 수 있는 항공편은 마련해 두는 것. 그리고 우리의 부푼 기대에 맞게 캠핑용 자동차 정도는 예매를 해 두어도 좋겠다는 계획이었다. 시간이 가면 고공행진 할 것만 같던 항공권 예매를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또 미루길 한참. 결혼식이 세달 남짓 남은 마당에 항공권 예매를 속시원히 해결하고, 캠핑용 자동차 예매 또한 구글 지도를 부지런히 검색해 평이 좋은 렌탈 업체를 추려 몇군데 업체와 견적을 주고받고 대화를 이어가며 결국 한 곳을 정했다. 나미비아에 도심에 위치한 SUV 캠핑 자동차 렌탈 업체. Garth라는 이름의 업체 담당자는 렌탈을 위해 숱한 질문을 해대는 우리에게 끝까지 친절함을 베풀어 주었다. 나미비아 시내 빈트후크에서 차를 빌려 나미비아 전역을 돌고 접경국가인 보츠와나와 짐바브웨, 잠비아를 여행하며 최종목적지인 잠비아 인근에서 렌트카 반납을 하려 했던 우리. 그런 우리에게 잠비아의 경우, 보험료 측면에서도 그렇고 차량을 인수해서 돌아오는 부분도 훨씬 많은 금액이 들 수 있다며 보다 안전한 장소인 짐바브웨에서의 렌트카 반납 옵션을 추천 해 주었다. 게다가 공항 픽업까지도 와 준다고 약속해준 Garth, "나미비아에 도착하면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해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 담당자였다.
그렇게 큰 두가지 숙제를 해결하고 나니 신혼여행, 아니 우리의 신혼모험의 90%는 계획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고 갈 항공권, 어디든 갈 수 있는 차, 그리고 어디든 정박해 머물 수 있는 캠핑도구들까지. 더할나위 없이 알찬 계획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무모하기 짝이없는, 무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여정에 어떤 일이 펼쳐질 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기대되기 시작했다.
# 그래서 20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서 바로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시작한다고?
지인들에게 나미비아로 신혼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길 하면 "우와, 아프리카로 신혼여행이라니!"라는 호기심 어린 신기해하는 반응과 "신혼여행을? 나미비아로? 와... 대단하다.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푹 쉬는게 좋지않아?"라며 반즈음 우려 섞인 반응이 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떠나고 떠나기만 하는, 항공과 지상에서의 탈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계획이었기 때문. 사실 9월 언저리 언제인가 바쁘디 바쁜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과감하게 우선순위 설정에서 긴급도와 중요도의 최하위 랭킹을 차지한 '아프리카 신혼여행 세부 계획'은 호기롭게 항공권과 교통편만 예매한 채, 환전도 비자 발급도 그 무엇도 준비하지 않고 멈춰있었다. 그러다 10월이 다가오고, 바쁜 스케줄을 하나하나 미션 완수하듯 소화해내며 조금씩 여유가 찾아오는 듯 싶었다. 아니 어쩌면 바쁘다는 건 마음의 핑계는 아니었을까. 시간은 언제나 한결같이 주어졌지만, 마음만 분주했던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쩌면 지금이 더 할일이 많은 시기임에도 시간에 쫒기지 않고 시간을 요리조리 조물조물 나의 일정에 맞게 요리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한동안 마음만 분주하던 나와는 달리 D는 다 계획이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바쁜 그는 일잘러답게 요란하지 않게 우리의 여행을 차근차근히도 떠올리고 계획을 하고 있었나보다. 어느날 문득, 여유가 생겨 퇴근 후 뒹굴뒹굴 누워 D와 함께 나미비아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D에게 "우리 근데 생각해보니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가서 또 캠핑 자동차를 타고 떠나면 좀 피곤하긴 하겠다 그치?"라는 이야길 했다. 그랬더니 이미 생각이 다 있었다는 듯, D는 "안그래도 도착한 다음 날 캠핑카를 빌려서 이왕이면 시내도 좀 돌아보고 주변으로 나가보려고 했어."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디테일하게 그의 의견을 나눠줬다. 그렇다. D는 연애 초기때부터 행동도, 생각도 모든 면에서 훨씬 앞을 계획하고 체계적인 친구였다. 6년을 만나면서도 알면서도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D의 계획은 결국 모두 잘 짜여진 계획들이었단 걸. 어쩌면 잘하려는 의욕이 앞서 허둥대는 나보다도 차분하게 체계적으로 모두가 만족할만한 계획을 세우는 건 그였는데 D의 그런 모습을 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또 다시 들던 순간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다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땐 투닥거리곤 했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순간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돌이켜보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전에 다른 관점에서 한 수 내다보고 '우리'를 위해 숱한 선택과 의견을 내는 D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결혼은 정말이지 어리숙한 나를 돌아보게 해 주고, 내가 아닌 상대방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행하게 해 주는 일련의 과정이라는게 와닿는 요즘이다. 얇고 길게- 오랫동안 이 마음을 유지해야지.
아무쪼록 그렇게 한 발짝 나아가 있던 그의 계획과 나의 뒤늦은 계획이 맞물려 첫 날은 결혼식과 오랜 비행으로 지쳐있을 서로를 위해 하루 즈음은 쉬어가는 날을 가지기로 했다. 하루 휴식이라는 일정동안 무엇을 할 지는 차차 떠올려 봐야겠지만,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이 계획속에 맞춰졌다. 현지 공항에 도착해 공항을 한 발짝 나갔을 때의 그 이색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시내로 이동해 그제서야 시작될 우리 여행의 첫 발자국. '시간은 많으니 가서 생각하자!'라고 계획했던 우리의 여행 계획. 어쩌면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의 젊은 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순간을 '일'이라는 우선순위에 밀려 보낼법했던 시간을 조금은 더 귀중하고 소중하게 가꾸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 하루였다.
'우리의 다음 퍼즐은 어떤 조각으로 맞추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