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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햐미햐미 Aug 03. 2023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는 이유

인생이 드라마보다 갑갑한 이유는 클리셰가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선 대개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이겨내면 행복이 찾아온다.

하지만 현생에서는 행복한 날이 언제 올지 알 길이 없다.

'열심히 살다 보면 해 뜰 날이 오겠지.'

막연한 희망을 붙잡으며 살아갈 뿐이다. 


파혼을 겪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말했다.

'지금보다 밑으로 내려갈 일은 없을 거야. 

이미 충분히 바닥이니까. 

최악을 경험했으니 이제 좋을 일들만 있을 거야.

이번에도 잘 이겨낼 거야.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자기최면을 걸어 꿋꿋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근데 인생에 굴곡 없는 사람들도 많아.

파혼이나 가족의 불화 같은 거는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들이잖아."


그 친구의 말에 답할 길이 없었다. 

'그러게. 나에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1. '서약서 보내드립니다'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전 남자친구였던 Y에게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메일을 열어 보니 발단 / 결과 / 다짐 / 다짐이 가능한 배경으로 나뉘어 적힌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발단과 결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은 A로 하겠다.)

나는 사귀는 동안 A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랐으며 금방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 하지만 소개팅을 해도 다들 마음에 들지 않았고, A가 잘해줬던 것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 더 어려워짐. 그 사이 A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걸 알고나서 나는 감정 조절에 실패함. 내가 A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상황이 악순환이 됨. 나는 A를 매일 떠올리며 불면에 시달리고 있음. 


Y는 본인에게 돌아온다면 연락을 지속적으로 잘 할 것이며, 두 달에 한 번씩 깜짝 선물을 해줄 것이며,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떠나겠다고 적었다. 결혼을 약속한다면 주택과 차량을 제공하겠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문서의 마지막에는 Y의 주민등록번호가 주소가 적혀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와 1년을 만났던 건가.

Y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아까웠다.

이별 후 이런 불필요한 감정을 겪게 만든 Y를 원망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없던 내 잘못이 가장 컸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사람을 잘 판단하는 건 아니다. 

 

2. '아들이 헤어지고 많이 힘들어 했어요.'

전 남자친구의 어머님에게서 문자를 받은 적도 있었다. 

헤어진 지 약 4~5개월 정도 지난 뒤였다. 


'A씨 안녕하세요. B 엄마입니다.'라고 시작한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들이 헤어지고 많이 힘들어했어요. 저와 한 번 만났으면 해요.

예쁘고 착한 A씨와 성실하고 배려를 잘 하는 B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연락 주세요.'


그리고 문자 한 통이 더 왔다.

'B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문자를 받자마자 너무 놀라서 육성으로 '헉' 소리를 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최대한 예의 있게 회신했고, 어머님에게 이런 답장이 왔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한 응답이 A씨라 생각되어 마음이 아프네요. 마음이 열리면 기회를 만들어요.'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어찌 됐든 헤어지기는 잘했다.

그런데 나에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Y와의 이별 회고 연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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