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위에 피어난 봄
이별의 아픔과 아빠와의 갈등으로 지친 나는 외할머니 댁으로 도망쳤다.
외할머니댁은 양평에 있다.
서울의 빌딩숲을 벗어난 이곳은 참 평화롭다.
길가에 들꽃이 피어나 있고, 담장 틈 사이로도 작은 생명이 고개를 내민다.
그 모습에 나는 종종 위로를 받는다.
결혼을 앞두고 H와 이별했다.
아빠와는 크게 다퉜다.
현실을 버티기 힘들었던 나는 캐리어에 한가득 짐을 싸 외할머니댁으로 달려갔다.
외할머니는 그런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셨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주인공 금명이(아이유)가 파혼을 하고,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을 때 이런 대사가 나온다.
속이 다쳐온 딸을 위해 그들은 또 하나만 해댔다.
그들은 나를 기어코 또 키웠다.
내가 세상에서 백 그램도 사라지지 않게 했다.
우리 할머니도 그랬다.
나를 위해 매일 한 상 가득 밥상을 차려주셨다.
할아버지는 도시에서 온 손녀의 입맛이 신경 쓰이셨는지, 저녁마다 자전거를 끌고 시내에 나가 치킨을 사 오셨다.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거실에서 상을 펴고 먹은 양념치킨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출퇴근 시간은 2배로 늘었지만, 마음은 2배 이상 빠르게 회복됐다.
오롯이 나를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할머니댁에서 출퇴근한 지 3주 정도 지나자,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얼굴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나는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2025년 봄, 이상형 찾기의 난항을 겪던 나는 또 외할머니댁으로 내려왔다.
할머니는 제철 음식으로 정성스러운 밥상을 차려주셨다.
할머니 밥을 먹고 있으니 4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사랑을 찾아 헤매고, 나 자신을 떳떳하게 생각하지 못하며, 아빠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면 뭐 어떤가. 이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나의 방공호가 있는데.
벚꽃 시즌이었다. 서울엔 벚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곳곳이 붐볐다.
할머니 동네의 벚꽃 아래는 한산했다.
할머니와 엄마의 손을 잡고 꽃들을 구경했다.
"할머니, 이 꽃은 색이 왜 이래요?"
할머니댁 앞에 핀 꽃잎의 색이 바래있었다.
"백목련인데, 올해 서리를 맞아서 이렇게 됐어. 속상하지? 원래 엄청 예뻤잖아. 그래도 내년엔 더 예쁘게 피어날 거야. 어떻게 매년 예쁠 수 있겠어."
서리를 맞은 백목련을 보며 나는 괜한 위로를 받았다.
지금 잠깐 외롭고 힘들어도 괜찮다.
더 예쁘게 피어날 그때를 위해 오늘을 잘 견뎌내자.
서른여섯이다. 친구들은 거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조금 늦어지면 어떠한가.
꽃마다 피고 지는 시기가 다르듯, 나의 개화 시기가 아직 안 왔을 뿐인 걸.
빨리 나의 이상형을 만나 내 방공호를 소개해 주고 싶다.
오래오래 함께해 주세요, 나의 방공호.
붙임. 할머니 동네에서 만난 소중한 생명들
나이 들수록 꽃 사진을 자주 찍게 된다고 한다.
어른이 될수록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