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이름의 방아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내가 먼저 안정감과 신뢰를 주고 싶은 사람.
그런데, 사랑보다 먼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약속이 많은 편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대화가 끝날 줄 모른다.
매번 만나도 뭐 이리 할 말이 많은지, 자리가 늘 길어진다.
그래서 남자친구들한테 항상 미안한 입장이었다.
토요일 밤 11시, 친구들과 3차를 즐기고 있었다.
P에게 전화가 왔다.
"자리 길어지나 보다. 나는 이제 자려고."
"나는 내일 쉬는 날이라 조금 더 있을 것 같아. 집 가면 톡 남길게."
밖에서 P와 통화를 하고 자리에 앉는데, 친구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언니 그거 알아? 전화받으러 나가는데 입이 귀에 걸렸어."
"에이. 그냥 토요일 밤이라 기분이 좋아서 그래."
친구들의 시선은 정확했다.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갖는데도 P가 마음에 걸렸다.
12시가 넘어가자 슬슬 불안하기 시작했고, 결국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P가 혹여나 나 때문에 못 자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좋아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나의 즐거움을 포기하고서라도 그 사람의 기분을 기꺼이 맞춰주고 싶은 것.
상대에게 불안함보다는 안정감을 주고 싶은 것.
적어도 내가 먼저 이 관계에서 신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나의 충섭이를 찾아가는 듯했다.
"너는 왜 이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어?"
P와 나의 관계를 들은 누군가가 말했다.
나이 차이, 첫 만남 장소,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않은 상황.
나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건네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너 아빠 때문이야. 보통 여자들의 이상형은 아빠라고 하잖아. 네가 아빠한테 받은 상처 때문에 남자를 잘 못 고르는 거 아니야?"
나에게 아빠는 트리거였다.
10년 전부터 아빠는 가장의 역할을 내려놓으셨다.
아빠가 식당을 차리면서 빌리셨던 돈은 고스란히 나의 빚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빠의 불륜마저 목격했다.
아빠라는 방아쇠가 당겨진 순간, 나는 감정 조절에 실패했다.
좋게 보이던 것들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니까 넘어갈 수 있던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의심과 불신은 내 마음을 못나게 만들었고, 결국 나는 좋아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아빠라는 무거운 비밀을 들키기 싫었던 걸 수도 있겠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상형을 찾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나의 오래전 이상형이었던 아빠를 마음에 품는 일이었다.
첫 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