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의 동태찌개

(Feat. 옛날식)

by 김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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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동태를 사 왔다. 부엌이 소란스러워졌다. 허리와 무릎이 더욱 안 좋아지면서 언제부턴가 할매가 요리를 하는 건 그리 흔하지 않은 풍경이 됐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당신이 드시고 싶은 것이 생길 때나 엄마가 집에 없을 때, 또는 오빠에게 먹이고 싶은 것이 생길 때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 할매는 죽기 살기로 요리를 한다. 오늘은 엄마 회사에서 송년 모임이 있는 날이다.


우리 할매로 말할 것 같으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엄청난 대가족의 큰며느리로 들어와, 집안일부터 농사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앞으로는 자신의 큰 아들을 안고, 뒤로는 남편의 막냇동생을 업고 그 고된 일을 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동네잔치급으로 치르는 명절이면 고무대야 몇 다라에 달하는 전을 부쳤다고 하니, 부엌일과는 영 친하지 않은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할매는 온몸이 망가졌지만, 그만큼 음식 솜씨로는 동네에서 손꼽히는 유명인사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할매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된장찌개를 소태같이 끓이거나, 고사리를 떡이 되도록 삶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그렇다. 할매는 늙어버렸다. 웬만한 레시피보다 정확했던 눈대중도, 손의 감각도, 한 번 맛보면 뭐든 척척 만들어 낼 수 있던 대장금 뺨치는 미각도, 모두 함께 늙어버렸다.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가족들 모두 슬퍼할 겨를이 없었으니, 예상치 못한 고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할매는 요리를 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혼잣말을 쏟아낸다. 대부분 한 마디 말을 무한히 반복하는 식이다. 그중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옛날식으로 한 번 만들어 봐야지." 그 뒤에 붙는 말도 대체로 늘 비슷하다. "새우젓(혹은 들기름 혹은 기타 등등 할머니가 좋아하는 식재료들) 듬뿍 넣고 끓여봤는데 식구들이 잘 먹을까 모르겠네."와 같은 식인데, 이 말인즉슨 "잘 안 먹으면 나는 무진장 삐질 거야."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온 가족 모두가 웬만하면 맛있게 먹는 편이지만 가끔은 도저히 숟가락과 젓가락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며칠 전 두부찌개가 그러했으니- 그날 우리의 대화.


"국이 어때?"

"좀 짜다."

"아이고, 이것도 안 짜면 싱거워서 못 먹어요."

"이게 안 짜다고?"

"싱거운 거보다 나."

"간이 맞는 게 제일 낫지."

"간이 맞아. 이건 이렇게 먹는 거야."

"아, 그럼 왜 물어봐?"


'할매와 손녀의 흔한 대화.txt'라고 적어도 좋을 만큼 흔하게 벌어지는 상황이다. 엄마는 워낙 잔소리가 없는 편이니 별 말을 않고, 아빠는 길게 얘기하기보다는 한 번 확 짜증을 내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오빠는 집에서 밥 먹을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이런 식의 설전은 오로지 나랑만 주고받는다. 솔직히 나는 울 할매가 엄마의 요리에 트집을 잡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은지라, 나름 '엄마의 복수' 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괜히 더 땍땍거리는 거다.


허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니, 여러 차례 말했듯이 우리는 '애증'의 관계다. 하여, 할매가 애써 만든 반찬에 손도 대지 않는 아빠가 미울 때도 있고, 구부정한 자세로 가스레인지 앞을 지키는 할매의 뒷모습에 눈물이 왈칵 나올 때도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영하의 날씨 속에 기어이 나가서는, 동태를 사들고 들어온 할매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코끝이 시큰거린다. '옛날식으로'를 운운하며 기대와 걱정 속에 조심스레 찌개를 끓이는 울 할매가 너무 애처로워서,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소심하게 나를 부르는 할매.


"간 좀 봐볼래?"


그 한마디 말에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 마음을 꾹꾹 누르느라, 찌개 간이 짠지 싱거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맛있게 먹는 것, 그리고 아빠 역시 맛있게 먹게 하는 것. "아빠, 오늘은 속이 안 좋아도 저녁 맛있게 먹자. 할매가 동태찌개 끓였어. 우리 효도하자." 아빠는 깊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울 아빤 뭐든 참 자주 깨닫는 귀여운 면이 있다. 사실 울 아빤 까다로운 미각의 소유자라, 효심만으로는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행히, 오늘의 동태찌개는 정말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와, 오랜만에 이렇게 옛날 식으로 먹으니까 엄청 맛있네!" 아빠의 말에 할머니 입이 귀에 걸린다.


오늘 나는 평소의 두 배에 달하는 저녁밥을 먹었다. "진짜 맛있다!", "배부른데 계속 먹게 되네."와 같은 감탄사를 무한 반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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