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없인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할매는 며칠 전부터 끌탕 진탕을 했다. "김장을 얼른 해야 하는데... 다른 집들은 다 했던데..."
지난해 배추가 물러 공들여 한 김장을 망쳤더랬다. 겨울 내내 김치찌개만 줄창 먹은 온 식구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 너무 일찍 김장을 하여 배추가 실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하여 올해 김장은 조금 늦게 해보기로 했다. 물론 할머니도 이에 동의했기에 오늘 날짜로 절인 배추를 받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그랬으면서! 11월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김장 타령이다. 김장을 해놓지 않으면 전쟁이 터져 겨우내 배를 곯아야 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하는가 보다. 마침내 오늘 배추 속을 채우면서도, 할매는 뭔가 계속 맘에 들지 않는다. "너무 적은 거 아닌가... 배추 속을 더 넣어야 하는데..." 마치 노동요처럼 끊이지 않는 이런 소리들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육체의 피로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다.
김장을 대하는 할매의 태도는 거의 경건함에 가까울 정도다. 감히 말하건대 과전법을 향한 정도전의 열정에, 사기에 대한 사마천의 책임감에 뒤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집착과 열의를 보인다. 거의 뭐 지구를 구하기 위한 슈퍼맨의 결의와 고군분투 수준이랄까?
할매한테 '김장'이란 도대체 뭘까.
새로 한 김치와 돼지고기 수육을 배추 잎에 싸 먹는데 함께 놓인 새우젓을 보며 할매가 옛날이야기를 한다.
"옛날엔 이 새우젓이 그렇게 귀했어요. 옛날에 내가 김장을 하면, 지금 하는 건 뭐 소꿉장난이지. 옛날에 내가 김장을 하면 그거를 머리에 이고 쩌-기 포구 쪽으로 가서 새우젓이랑 바꿨어. 새우젓이 귀하니까. 그땐 뭐 이렇게 어디 가서 사도 못했지. 근데 내가 김장을 많이 하고, 잘하니까 거기 가면 바꿔 주는 거야. 근데 거기가 좀 멀어? 지금처럼 뭐 버스가 있어 뭐가 있어. 갈 때는 김치 이고 올 때는 새우젓 이고... 옘부럴, 그러니 내 허리가 성해? 지금은 금덩이를 준대도 못 하지. 아무튼 그렇게 해서 새우젓 한 항아리를 받아와서 두면, 세상에- 그렇게 부자 같을 수가 없어. 김장하면 꼭 그렇게 부자 같았어."
문득 얼마 전 카페에서 엿들었던 두 여인의 대화가 생각난다. 누구 시어머니가 더 초특급인가를 겨루는 배틀에 가까웠던 그들의 대화. 그중에서도 귀에 쏙 들어왔던 얘기가 하나 있었으니- "야, 말도 마. 우리 시엄마는 지금 몇 주 째 뻑하면 전화해서 김장 타령이야. 김장 언제 하냐고. 아니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자기 아들 겨울에 김치 못 먹을까봐? 어우, 진짜 짜증나!"
할매들에게 김장이란 그런 거다. 한평생 모은 돈으로 마련한 조그만 식당 같고,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둔 적금 통장 같은 것. 다 똑같다. 가난했던 시대 탓도 있겠지만 '엄마'라는 이름 또한 단단히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엄마도 언젠가는 할매가 되겠지. 어쩌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