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의 유언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을

by 김여은


할매가 병원에 다녀왔다. 허리 때문이다. 올해 들어 급격히 나빠진 허리 탓에 할매는 종종 울었다. 그리고 매일 기도했다. 제발 죽는 날까지 당신의 두 다리로 교회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나 며칠 전 찾아간 병원에서도, 오늘 다녀온 더 큰 병원에서도 수술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한다. 한데 그 수술이라는 것조차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으며 할매의 오랜 지병인 고혈압 탓에 위험할 수 있다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돌아온 할매는 방안에 모로 누워 미동이 없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나는 할매가 온몸으로 울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할매는 정말 아프고 두려운 거다. 아무리 아파도 이 꽉 깨물고 걸레질을 하는 우리 할매가, 여간해선 아프다 소리 않는 우리 할매가, 정말로 아픈 거다. 그리고 그 아픔이 얼마나 더 지속되고 악화될지 몰라서 겁이 나는 거다. 늙고 병드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늙어보지 않은 나는 감히 그 슬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나마 그 고통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덩달아 눈물이 난다. 엊저녁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할매를 식탁에 혼자 앉힌 게 생각나 스스로가 너무너무 밉다. 세상에 식구밖에 없는 할매에게, 나는 왜 수많은 끼니때마다 식구로 함께해 주지 못했나 싶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들었던 얘기 또 듣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할매와의 대화를 거부했던 건지... 아침 먹고 가라는 잔소리가, 치마가 짧다는 쿠사리가 뭐 그리 못 들어줄 얘기라고 그토록 짜증을 냈던 건지... 나는 정말이지 천하에 못된 손녀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갑자기 거실에 나와 자기 도장이 없어졌다며, 다시 만들어야겠다며 바쁜 엄마를 채근하는 할매에게 나는 속으로 무진장 짜증을 냈다. 노인네가 도장 쓸 일이 뭐 있다고, 뭐 급한 일이라고 저렇게 며느리를 귀찮게 하나. 그런 생각에 맘속으로 눈을 흘겼다. 그랬는데, 나는 할매가 그토록 애타게 도장을 찾아 헤맨 이유를 오늘에야 알았다.


할매는 오늘 아침, 병원에 가기 전 출근하는 오빠를 자기 방으로 불렀단다. 그러더니 오빠더러 장롱 안에 자기 통장이랑 도장, 그리고 그동안 니들한테 받은 용돈 다 있으니 나 죽으면 잊지 말고 쓰라고, 그런 소릴 했단다. 오빠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뭐 그런 소릴 하냐고, 괜한 걱정 말고 병원 잘 다녀오시라 하고는 출근길 차 안에서 눈물을 쏟았단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방금 들은 이 얘기를 곱씹으며 퇴근길 버스 안에서 코를 훌쩍이고 있다.




늙는 건 어찌 이리 슬플까. 죽는 건 또 어찌 이리 무서울까. 할매의 늙음도 슬퍼 죽겠는 내가, 할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서 그날이 안 올리 만무하다만은, 그래도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한참 뒤에 찾아오길 바란다. 할매가 조금만 천천히 늙고, 조금만 덜 아프면 좋겠다 싶다. 부디. 부디부디. 꼭 그랬으면 좋겠다.


하여 나는 아직 통장이 어떻고 도장이 어떻고 하는 할매의 얘기를 진지하게, 진짜 유언이나 되는 양 듣고 싶은 맘이 없다. 할매의 마지막 말은 이다음에, 나중에 나중에 들을 거다.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집에 도착해서 할매에게 따져 물을 거다. 왜 오빠한테만 그런 얘기를 해주냐고, 다 오빠 주고 갈 거냐고 장난스레 시비나 걸 거다. 그럼 울할맨 또 무지 당황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하겠지. 그런 거 맞으면서.


할매! 내가 할매한테 쌓인 거 엄청 많은 거 알지? 왜 오빠만 예뻐하냐고 앞으로도 최소 10년은 더 따질 테야. 그러니 계속 싸우자 우리. 앞으로도 오래오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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