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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Nov 13. 2020

비혼 : 우리 앞에 펼쳐진 넓고 자유로운 평원

Part 1. 집과 함께 자란다 _ 두 번째 집


강남역 살인사건과 빨간 약


 동거 초기에 룸메와 함께 외식을 하는 것은 연례행사였다.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최소한 둘 중 하나는 항상 연애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연애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하지 않는 것이 불완전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차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나의 부족함에 대해 고민하고, 상대의 마음이 식어도 내가 잘못한 건 없는지 먼저 살폈다. 타인의 마음에 내 마음을 올려두었으니 의지와 상관없이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먼저 좀 더 좋은 사람이 된다면, 내가 좀 더 예뻐진다면, 살을 좀 더 뺀다면, 그렇다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독처럼 머릿속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2016년 5월. 강남역에서 한 남성이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일곱 번째로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룸메와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여성들의 머리에 도화선을 당겼다. 여성이기 때문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내가 그 피해자일 수 있었다. 그 명확한 사실이 분노의 씨앗이 되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앞에 빨간 약과 파란 약이 놓인다. 파란 약을 먹으면 가짜 세계인 매트릭스 안에서 안주하게 되고, 빨간 약을 먹으면 진짜 현실 세계에서 깨어나게 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빨간 약이었다. 여성 혐오라는 것이 구체화되어 눈 앞에 들이밀어졌다. 여성들은 강남역에 포스트잇을 붙여 희생자를 추모하고, 나아가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압박과 차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다음 카페 등 수많은 온라인 공간에서 담론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룸메가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 혐오가 아니라 그저 '확률 게임'이라고 말한 남자 친구와 싸우고 들어왔다. 확률도 게임도, 그가 희생자가 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없었기에 말한 무심하고 무례한 단어였다. 카톡과 전화로 싸우며 실제로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가 얼마나 일어나는지 논문과 통계자료를 찾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성들은 남편에 의해, 남자 친구에 의해, 아버지에 의해, 그리고 낯선 남성에 의해 수도 없이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페미니즘 게시물을 접하고 관련 글을 연달아 읽다가 밤을 지새웠다. 모든 글에 공감이 가고 모든 글이 나의 이야기 같았다. 우리가 그동안 개인의 일로 치부해왔던 일련의 사건들은 여성 혐오와 차별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었다.






비혼 : 우리 앞에 펼쳐진 넓고 자유로운 평원


 한참 연애할 시기에 룸메와 마주 앉아 각자가 원하는 이성의 조건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본 적이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기본적인 맞춤법은 지킬 것, 성실할 것, 연락이 잘 될 것, 일에 대해 진지할 것,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것, 긍정적일 것, 말이 통할 것 등등. 추상적인 조건도 있고 구체적인 조건도 있었다. 리스트를 다 작성하고 나서 내용에 대해 말해보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여자는 정말 많은데, 남자는 정말 없네."


 룸메와는 그 좁은 집에 살아도 싸우지 않았는데, 애인과 만날 때면 그렇게도 싸울 일이 많았다.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은 어디서 왔던 것일까? 한 연애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연애가 시작될 때 이번 사랑은 룸메와의 관계처럼 평탄하기만을 바랐다. 처음에는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듯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구멍나 자존감과 함께 쓸려나가 버렸다.


 그러다가 페미니즘을 접하며 깨달았다. 화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예쁘지 않아도 된다. 날씬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누군가의 트로피, 인형, 혹은 전리품이 되지 않아도 된다. 연애하지 않아도 괜찮고,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 눈 앞에 있었던 좁고 험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길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넓고 자유로운 거대한 평원이 펼쳐졌다. 룸메이트 같은 남자를 찾을 게 아니라 그냥 평생 룸메와 같이 사는 옵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더 이상 누군가와 밤에 통화를 하다가 울적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지 않게 됐다. 나는 그 자체로 온전한 인간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1년 만에 화장까지 지웠다. 혜화역과 광화문 집회에서 불편한 용기 시위에 참여하며 우리와 닮은 모습의 자매들을 보았다. 의존적으로 하던 연애를 끊었다. 룸메도 비슷한 시기에 헤어져 오랜만에 둘 다 솔로가 되었다. 주말에 함께 어디론가 놀러 가거나 주중에 함께 외식을 하기도 했다. 연애할 때는 매일 같은 행위에 사라지는 돈이 아쉬웠는데, 나와 내 친구들에게 쓰는 돈은 단 한 푼도 아깝지 않았다. 삶의 1순위에 나 자신이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그 모든 살림은 나무도마 하나에서 비롯됐다


 계속 함께 산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집을 임시로 쓰기 싫어졌다. 언젠가는 버릴 것이라 생각해서 집안은 온통 주워 온 가구 천지였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새로 사기는 아까워 그대로 끌어안고 살았다. 어느 날 코엑스에서 하는 박람회에 간 룸메가 톡을 보내왔다. 나무 도마를 사려고 하는데, 어떤 모양이 더 마음에 드냐는 것이었다. 기다란 직사각형의 도마가 눈에 들어왔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병과 함께 플래터를 주문하면 바로 그 도마에 치즈와 살라미가 정성스레 놓여 우리 앞에 오는 상상을 했다.


 집에 와서 도마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나무 도마가 놓일 수 있었던 여러 상황 중에 가장 형편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몇 년을 사용해 낡은 티가 나는 접이식 식탁은 상판이 나뭇결무늬의 시트지였고 사방으로 주황색 고무 패킹이 둘러져 있었다. 도마를 가로로 놓았을 때 넘칠 정도로 좁았다. 번듯한 식탁이 절실했다.


 입식 식탁을 놓기에는 집이 좁아 보였다. 접이식 가구는 모두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짙은 색의 원목 식탁을 샀다. 맨바닥에 앉아있으려니 장판이 마음에 걸렸다. 쇼핑리스트에 카펫이 추가됐다. 테이블과 카펫, 그리고 나무도마가 있으니 테이블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이소에서 그나마 디자인이 괜찮아 보이는 그릇을 사고, 세일하는 매장에서 테이블 매트를 샀다. 그제야 우리 집에 제대로 된 거실 공간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사 가기 전까지 약 2년 간 테이블 앞에 앉아 글도 쓰고 일도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도 주최했다. 우리에게 '방'이 아닌 '집'이 생긴 최초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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