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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Nov 16. 2020

이직 : 인생에서 세 번째로 큰 변화

Part 1. 집과 함께 자란다 _ 세 번째 집


이사의 이유


 옆 동네와 앞 동네가 밀리고 아파트가 세워지는 것을 보며 동네를 떠날 시기가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 겨울부터 집을 보러 다녔지만 싼 집을 떠나기 아쉬워 이사를 미루고 있었다. 우리를 그 집에서 쫓아낸 것은 집주인도 철거도 아닌 단 한 마리의 벌레였다. 2019년의 여름, 폭염이 오지 않아 덕분에 쾌적한 계절을 보냈지만 벌레들의 개체 수가 크게 증가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전주로 즐겁게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밤이었다. 열한 시 반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전에 없이 큰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바 선생 한 분이 부엌 바닥을 차지하고 있었다. 몸통만 검지와 중지 두 마디를 합친 사이즈였다. 아랫집이 이사 가고 한동안 비어있더니, 하수관을 타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둘이 소리를 지르며 잡으려 했지만 쉽사리 손을 뻗지 못했고, 결국 그분은 침실 가구 밑으로 숨어버렸다. 도저히 집에서 잘 수 없다는 판단에 방역업체를 수배해 새벽에 다시 오기로 하고 함께 여행 갔던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날 우리와 방역 기사를 반긴 것은 배를 뒤집어 까고 죽어 있는 사체였다. 알이 있으면 다음 집까지 옮겨올 것 같아 독한 약을 써 온 집안을 소독했다. 약이 퍼지고 벌레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 집 앞 카페에서 부동산 어플로 이사 갈 집을 찾았다. 이번에는 오래된 집으로 가지 말자, 벌레를 보니 낡은 방은 지긋지긋하다, 우리도 신축으로 가보자, 5년 이내 준공으로 찾아보자, 그래도 반지하는 안된다, 하면서 고른 것이 낯선 동네의 세 살짜리 준신축 빌라였다. 보고 온 집이 마음에 들어 보름 후에 같은 면적에 30년은 젊은 그 집으로 이사했다. CCTV와 엘리베이터, 현관 비밀번호가 있는 집으로 이사오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직 : 인생에서 세 번째로 큰 변화


 작은 원룸에서 1.5룸으로, 그리고 드디어 투룸으로. 가시적으로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동기부여가 되는 일이었다. 이사할 즈음 나는 또다시 커리어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었다. 다니던 건축사사무소를 그만두고 2년 동안 준비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잠시 다른 사무소에 다녀보았지만 여러 문제로 금세 나왔다. 22살부터 쭉 해왔던 '계속 건축을 해도 되나?'라는 고민이 또다시 등장했다. 신축 건은 점점 줄어들고, 경기에 따라 오르내리는 게 심한 건축이 나의 미래를 책임질 직업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잠깐 일하다 그만둔 회사에서 했던 말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20년 동안 설계비가 오르지 않았어.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직원에게 일한 만큼 다 줄 수 있겠어?" 아, 대표로서는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지만 해고당하는 직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아무튼 건축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계속 생기자 일단은 프리랜서로 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프리랜서 생활은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났다. 건축설계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한 게 패착이었다. 지인들을 통해 급하게 들어온 알바 자리는 다 급한 일을 요하는 일이었고, 딱히 커리어에 도움이 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스스로 사업을 꾸리는 프리랜서가 되려면 전문분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할 줄 안다고 맡는 일은 그저 알바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 메인 분야가 아니라면 그 분야의 전공자, 경력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결국 다시 건축 관련 일을 찾기로 했다. 설계사무소를 제외한 건축 업계에서 말이다.


 닥치는 대로 취업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고 지원을 하는데 의외로 면접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연봉이 괜찮은 공고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몰렸다. 큰돈을 벌고 싶으면 큰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런 곳에서는 큰 프로젝트를 해봤던 경력자를 필요로 했다. 작은 프로젝트만 진행해봤던 나로서는 무리였다. 작은 일을 하는 곳은 당연히 환경과 연봉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알바 사이트에 올린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취업 사이트에는 취업용 이력서를, 알바 사이트에는 생존을 위한 알바용 이력서를 올려두었는데 오래전에 올려두고 잊어버렸던 이력서를 보았던 모양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인테리어 시공 회사였다.


 설계사무소에서는 현장에 나가봐야 일주일에 한 번, 30분 정도라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늘 답답했었다. 건축은 흔히들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왜 그냥 예술이 아니라 종합예술이라고 하냐면, 사회, 문화, 예산, 클라이언트, 환경, 주변 민원인, 높은 연교차 등 정말 많은 요소를 담아 기술적인 방법으로 구현해내기 때문이다. 즉, 앞에 언급한 것을 다 알더라도 맨 마지막에 있는 기술을 모른다면 제대로 도면을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설계사무소에 다닐 때에도 잠깐만이라도 시공회사에 다닌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다. 연락을 받고 찾아간 인테리어 회사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일단은 사무실이 넓고 쾌적했고, 내가 유일한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디자인한 결과물을 온전히 나의 성과로 삼을 수가 있었으며, 대표가 일 전체를 아우르는 지식과 기술,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생은 꽤나 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체로 즐겁게 회사를 다니고 있다. 연봉도 올랐고,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보일 정도다. 룸메도 이사   5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준비하여 가장 원하던 회사에 단번에 입사했다. 코로나 시국에도 여전히 유능한 경력직을 뽑는 회사는 많았다. 그렇게 우리는 대입, 신입을 거쳐 이직이라는 인생에서  번째로 가장  변화의 기로에 서서 괜찮은 성과를 이뤄냈다. 불안정하고 우울했던 20대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아 외쳤다. 앞으로 나아가야  길은 여전히 안갯속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가시거리는 조금  길어졌고 엔진의 출력도 좋아진 기분이다. 누군가가 20대에는 가족의 재력과 주변인, 학벌 등의 요소로 일을 시작한다면 30대에는 20  만들어놓은 실력이 드러난다고 했다. 우리마른 땅에 뿌리를 내리는 씨앗이 되어 괴로운 20대를 보냈으나 덕분에 멋진 30대를 시작할  있었다.






침식의 공간이 분리된 삶


 아파트 평면을 말할 때 흔히 나오는 용어 중 하나는 LDK다. 거실(Living room)과 식당(Dining room)과 부엌(Kitchen)의 배치가 아파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세대 주택을 말할 때는 원룸, 투룸, 1.5룸 등으로 지칭한다. 방의 개수 앞에 '분리형'이라는 말이 붙기도 하는데, 이는 부엌과 방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세대 주택은 대개 LDK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대부분 식사하는 공간과 잠자는 공간이 나뉘어있지 않다. 방이 곧 거실이고 식당이고 침실이다. 작은 공간을 쪼개서 쓰다 보니 일어난 일이다.


 이사한 집의 면적은 옛날 집과 같았지만 공간의 구성이 달랐다. 옛날 집은 현관과 부엌을 사이에 두고 큰 방이 한쪽에, 작은 방과 화장실이 반대편에 있었다. 부엌이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통과 동선이 되어 도저히 거실로 쓸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새 집은 중간 크기의 방 두 개가 있는 투룸이었는데, 부엌의 폭이 넓어 한쪽에 식탁을 놓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자는 곳과 먹는 곳, 즉 침식의 공간이 드디어 분리된 것이다.


 기능에 따라 공간이 나뉘며 좋아진 점은 여러 가지다. 방 하나는 벙커 베드를 놓아 침실로 사용하고, 나머지 하나는 옷방으로 사용했다. 방문만 닫아 놓으면 공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거실과 부엌만 남는데, 프라이버시 보호에도 좋고 보기에 깔끔하기까지 하다. 고기나 생선을 요리할 때 냄새를 차단하기도 좋다. 무엇보다 공간마다 하는 행동이 정해져 있으니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좋다. 남향의 창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주말 아침에 오디오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거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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