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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Nov 11. 2020

적금 푸어의 삶

Part 1. 집과 함께 자란다 _ 두 번째 집


우리에게는 100평 같았던 10평짜리 집


 이사 간 집은 전에 살던 집과 비슷한 크기의 큰 방에 부엌과 작은 방, 화장실이 따로 있는 구조였다. 지은 지 30년 된 이 다가구 주택은 창밖으로 옆집 지붕과 나무가 보였다. 겨울에는 회색 시멘트 기와 위로 새하얗게 눈이 쌓였고, 여름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창문을 넘었다. 벽에 손을 대면 계절이 느껴질 정도로 단열은 형편없었고, 하필 창도 북향이어서 늘 어두웠지만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주방에서 보일러실로 나가는 문에 직접 롤 방충망을 설치했다. 해가 가장 깊이 들어오는 한낮에 접이식 식탁을 펴고 부엌 한가운데 앉아 문을 활짝 열고 초록색 나무가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기분은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았다.


 큰 방은 침실이었고, 서재였고, 거실이었다. 벙커 베드 밑에 있던 책상과 의자 두 세트를 꺼내놓아도 공간이 남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집이 넓어진 덕분에 룸메가 본가에서 오디오를 가져올 수 있었다. 커다란 스피커와 앰프가 세트인 클래식 오디오다. 로망을 실현하고서 행복해하는 룸메를 보며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토요일 밤이면 일요일 모닝콜로 쓸 음반을 골랐다. 그렇게 제일 좋아하는 음악으로 휴일을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들을 초대해 캐럴을 틀고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눠먹었다.




경제적 독립


 보증금 400에 월세 25. 월세와 보증금은 서울 시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룸메와 보증금 반, 월세 반을 나눠냈다. 한 사람 당 12만 5천 원의 월세였다. 덕분에 가족의 경제적 지원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묘하게 서운한 눈빛이었다. 재개발 지역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이 집의 주인은 동네에서 평생의 절반을 사신 토박이 노부부였다. 5번의 겨울과 6번의 여름을 보내는 동안 단 1원의 월세도 올리지 않으셨다. 이 집을 구한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명절마다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첫 회사의 첫 월급은 실수령 150만 원이었다. 콩알만 한 월급이었지만 그때는 큰돈으로 느껴졌다. 취직 후에도 대학 때의 소비 패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월세와 공과금, 통신비와 교통비에 생활비까지 쓰고 90만 원을 저축했다. 엑셀로 가계부를 만들어 항목 별로 지출을 관리했다. 커피 한 잔 조차 아껴가며 사 먹는 생활이었지만 통장에 쌓여가는 금액을 보면 뿌듯했다. 월급이 오를수록 저축액도 조금씩 키워갔다. 4년 후 퇴사할 때 통장 잔고에는 기천만 원이 찍혀있었다. 룸메의 월급과 소비 규모도 나와 비슷했다. 다만, 학자금 대출과 취업 준비 용도로 만든 마이너스 통장이 있었다. 이 집을 떠날 즈음에는 빚을 모두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저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룸메와 함께 살지 않았다면, 그리고 저렴한 월세방을 구하지 못했다면, 같은 돈을 모으는 데 걸린 시간이 배는 걸렸을 것이다. 월세와 관리비, 공동생활용품을 절반씩만 부담하니 소득에 비해 돈을 모으기가 비교적 쉬웠다.




걸어서 갈 수만 있다면 모든 곳이 체육관


 원래도 운동을 좋아했지만 돈을 그만큼 모으려니 헬스장을 끊을 돈도 아까웠다. 또, 회사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네 캔에 만 원 편의점 맥주로 모든 걸 해소할 수는 없었다. 집에서 한강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였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30분쯤 달리고 오면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개운해졌다. 가끔은 회사에서 걸어오기도 했다. 약 10km 거리였으니 걷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한없이 한강변을 걷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해있었다.


 운동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 에너지 차이가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했다. 에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근육이 꼭 필요했다. 달리기야 한강에서 하면 되지만 근력운동을 못 하는 게 아쉬워 찾아보니 '나이키 트레이닝 클럽'이라는 앱이 있었다. 아령과 요가매트, 몇 가지 소도구를 주문했더니 한 달 체육관 등록하는 값보다 저렴했다. 나이키 선생님의 목소리를 따라 3시간처럼 느껴지는 30분의 근력운동을 버텼다. 운동을 마치면 매트 위에 털썩 누워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직장인 4년 차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미세먼지가 해가 갈수록 심해진 어느 날, 회사에서 걸어서 2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복싱 체육관을 찾아갔다. 한국 챔피언이었던 관장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과 주거니 받거니 운동하는 게 재밌어 보여서 큰 맘먹고 등록했다. 3분만 제자리 뛰기를 해도 헥헥거리던 체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링 위에서 몸 대 몸으로 부딪치는 것도 꽤 재밌었다. 글러브를 받아주며 매번 맞아주신 코치님이 끊임없이 설득해서 생활체육대회에도 나갔다.


 대회 준비는 끝없는 스파링의 연속이었다. 한 달 내내 주 6일로 링에 올랐다. 맞아도 다시 주먹을 뻗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공격이 먹히길 바라며 팔을 뻗었다. 링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해 3분 간 포기를 외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버티다 보면 어느새 다시 링이 울렸다. 체급을 맞추기 위해 시합 당일까지 4주 간 소금, 술, 밀가루, 설탕을 끊고 7킬로를 감량했다. 6개월 간 주 5일을 운동해서 나름대로 자리가 잡힌 몸에서 더 빼내느라 고생이었다. 드디어 대회 당일 날, 계체량을 통과하고 만난 내 상대는 딸과 아들을 대동하고 나온 40대 중년 여성분이었다. 머리 반 개는 작은 키였지만 쉼 없이 인 복싱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3분 내내 난투극이 벌어졌다. 결과는 우승이었다.




적금 푸어의 삶


 가끔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면 조금 속상했다. 입사 후에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페이스북을 비활성화 상태로 돌렸다는 것이다. 딱히 원해본 적도 없었지만 친구들이 취업 기념으로 사거나 선물 받은 명품 지갑, 휴가로 간 해외여행 사진을 올리면 괜히 속상했다. 비교를 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여전히 집에서 밥을 해 먹고, 집 앞 한강을 걷거나 뛰고, 회사 탕비실에서 커피나 음료를 해결했다. 친구들과 만날 땐 반은 밖에서 만나고, 반은 집으로 초대했다. 요리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회사를 다닌 첫 3년 간은 이상하게 연애운도 오지 않았다. 연애를 하지 않으니 돈 모으기는 더 쉬웠다.


 돈을 열심히 모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돈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하기 싫었다. 무엇보다 평생 쓸 돈을 물려줄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생존'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퇴사할 때 즈음에 목표했던 액수를 다 채웠다. 어렵게 모았기에 큰돈이었지만 전세보증금으로 쓰기에는 또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재테크에 처음으로 관심이 생겨 재무설계사를 만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흔하디 흔한 보험설계사였다. 적금을 붓고 있는 돈에 대해 하고 싶은 걸 할 때 쓰려고 하는 돈이고, 결혼할 때 쓸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스몰웨딩으로 했을 때 혼수가 그 정도 금액이 들어간단 대답을 들었다. 충격적이었다.


 '결혼을 하면 제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결혼 후에 더 많이 번다는 보장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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