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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Nov 09. 2020

인연의 시작

Part 1. 집과 함께 자란다


자본주의가 낳은 룸메이트 : 인연의 시작


 인터넷 밈 중에 ‘자낳괴’라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의 준말로,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여기에서 파생해서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 있다. 바로 ‘자낳룸’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룸메이트.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동거 초기, 사이좋게 지내야만 했던 시절을 회상하면 정말 그 말이 딱 맞아떨어진다. 둘 중 하나라도 집을 나가면 통장 잔고와 심리상태가 위태로워질 게 뻔했다. 그러니 항상 서로를 조심조심 대했다. 이 시기가 있었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적응하고 지금껏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1인 가구 : 첫 독립과 함께 찾아온 우울과 가난


 룸메이트와 나는 인천의 모 고등학교 동창이다.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로 만나 시작된 인연이다. 우리가 3기인 신생학교였던 터라, 초대 교장선생님은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이 크셨는지 ‘심화반’이라는 이름의 성적 우수반을 만들어 따로 자습실을 제공했다. 당시에도 성적에 따른 차별이라고 말이 많았고, 지금은 없어진 모양이다. 공부를 꽤 잘했던 우리는 3년 내내 심화반에서 좌충우돌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고 매일 붙어 다닐 정도로 절친했던 사이는 아니다. 베스트 프렌드는 따로 있었고, 같이 노는 친구들의 무리가 겹쳤을 뿐이다. 이들과 평범하게 복도를 좌우로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놀았다.


 스무 살만 되면 번듯한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독립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통학, 기숙사, 고시원, 다시 기숙사를 거쳐 어렵게 허락을 받아내 3학년 2학기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첫 학기에는 넓은 면적에 반해 반지하 방을 덜컥 계약했다가 <파브르 곤충기 원룸 편>과  한 편의 범죄 스릴러물을 목도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결국 그다음 학기에 같은 건물 2층의 작은 방으로 짐을 옮겼다.


 자취방은 대학교 중문 바로 앞에 있는 낡은 빨간 벽돌 건물에 있었다. 가로 3미터에 세로 5미터, 화장실과 부엌이 서로 등을 마주대고 있고 남은 공간에 싱글 침대 하나와 옷장을 넣으면 끝났다. 딱 1인을 위한 최소의 공간이었다. 다행히 주거비와 학비는 지원받았지만 직접 벌어 쓰는 생활비는 늘 부족했다. 간신히 구한 과외 하나로 과제에 필요한 재료를 사고 제일 저렴한 학식으로 배를 채웠다. 잔고는 금세 다섯 자리가 되었다가 네 자리까지 내려가기 일쑤였다.


 심리적으로도 인생에서 제일 불안정한 시기였다. 애인이 있으면 있는 대로 비참했고 없으면 없는 대로 우울했다. 도저히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밤새고 노력해도 늘 타인과 비교해 스스로가 부족해 보였다.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한강 다리를 건너 다니며 물아래를 내려다보고 산책을 다녀오기를 수 차례였다. 학교 보건 관리소에서 무료로 정신과 검진을 해준다고 해서 찾아가니 정식으로 진료를 받기를 권했다. 먹고 살 돈도 없으니 병원에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눈 딱 감고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까 고민하기를 수 차례였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외로움과 우울이 찾아오면 옛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화를 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하소연일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문드러져가는 속보다는 제법 멀쩡해 보이는 일상을 얘기했다. 어느 날 저녁 침대에 누워있다가 이 친구가 떠올랐다. 근황을 물어보니 인천에서 학원이 있는 신림까지 왕복 3시간 거리를 통학하고 있다고 했다. 신림이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그리 멀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혹시 함께 살 생각이 있는지 물어봤다. 놀랍게도 흔쾌히 그래 보자는 대답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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