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성북동 산책

암만 바빠도 여행 떠날 하루쯤은 있겠지 #11

by 문마닐


10:40 길상사


오래된 집에서 고급주택으로 가득한 골목을 15분쯤 걸어올라 가면 길상사가 나온다. 성북동에 오면 한 번쯤 들러서 차 한 잔을 꼭 마시게 되는 곳이 이곳이다.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요정(기생 술집)이었는데, 이 때문인지 건물의 배치가 다른 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보통 산에 있는 절이 기다란 길 중간중간에 건물을 하나씩 세워 올라가는 과정부터 기도의 일부로 만들었다면, 이곳은 비슷한 경사에 건축물들이 좀 더 밀집되어 있다.


날이 더워 지쳤으니 꼭대기까지 둘러보지는 않고, 본법당인 극락전 맞은편에 있는 건물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작은 연못을 끼고 있는 건물 2층에 있는 북카페 ‘다라니 다원’은 불상을 모셔놓은 제단이 맨 안쪽에 있고, 반은 서가로, 반은 테이블로 채워져 있다. 여름의 더위를 날려줄 시원한 황매실 차 두 잔을 주문하고 앉았다. 찜통에 있다가 에어컨이 있는 실내로 들어오니 부처님의 은혜가 크다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다기에 든 황매실 차를 마시니 살 것 같다.


<길상사>
서울 성북구 선잠로 5길 68
다라니 다원 운영시간 _ 10:00-16:30
황매실 차 ICE 2800원
길상사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 무소유의 삶을 기억하다, 성북동 길상사 (한국관광공사)




11:30 북악 슈퍼


한참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에어컨 바람을 뒤로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길상사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북악 슈퍼’라는 이름의 그야말로 작은 슈퍼가 있는데, 이곳이 성북동의 코스트코다. 성북동에는 워낙 외국인도 많이 살고 대사관도 많아서 외국 식품을 많이 들여놓는다고 한다. 미국에서 먹었던 간식이나 인스턴트식품들을 구경하다가 젤리를 만들 수 있는 딸기맛 한천 가루와 그레이비소스 분말을 집었다. 추억 값으로는 조금 비싸긴 하지만 비행기 삯보다는 저렴하다. 항상 홀린 듯이 뭐라도 사게 되는 곳이 이곳이다.

<북악 슈퍼>
서울 성북구 선잠로 5길 37
Jell-o 5000원, 그레이비소스 분말 3000원




12:00 카레


열두 시에 여는 카레 집은 오픈 2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가게 앞에 줄이 길게 서 있었다. 작고 유명한 가게의 딜레마다. 실내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도 적은 것 같아 다른 집에 갈까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다. 이 땡볕에서 30분 넘게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순간, 출입문 앞에 접이식 우산이 담겨있는 작은 바구니를 발견했다. 친구와 번갈아가며 우산을 들어가며 40분 가까이 기다리고 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내부는 최대 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인데, 일본 도쿄의 작은 이자카야를 생각나게 하는 분위기다. 나무로 만든 가구는 짙은 오크 색이고, 벽은 흰색으로 칠해 정갈하다. 메뉴판은 손글씨로 적혀 있고 귀여운 스티커로 꾸며져 있다. 카레는 딱 두 가지로, 시금치 카레는 항상 판매하는 메뉴고 나머지 하나는 수시로 바뀌는 특별 메뉴라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이 메뉴가 키마 타코 라이스라는 드라이 카레였다. 이곳은 시판 카레 가루나 페이스트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 향신료를 직접 블렌딩 해서 사용한다. 타코가 카레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궁금해서 둘 다 특별 메뉴를 주문했다.


물 하나에 감동하게 되는 식당이 있다. 얼음 안에 과일을 얼려 찬물에 담가 서빙했던 한 이탈리안 식당 이후로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코르크로 닫은 유리 물병에 라임과 허브를 넣어 뙤약볕에서 기다렸던 손님을 위로한다. 곧이어 나온 카레도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했던 맛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멕시칸 요리인 엔 살라다 사이에 드라이 카레를 끼워 넣고 사워크림을 버무려 먹는 맛이다. 고수를 듬뿍 올려달라고 하길 잘했다. 기다릴 가치가 충분한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카레> @___uncurry
서울 성북구 성북로 62-1 1층
월, 일 휴무, 12:00-15:00, 17:00-20:00
키마타코라이스 13000원




13:18 해로 커피


아인슈페너가 맛있다는 한 가지 정보만 가지고 찾은 해로 커피는 옛 한옥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카페였다. 옛날에 동대문 근처에 사시던 외할머니 댁이 딱 이런 구조였는데,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있는 ㄷ자 집이다. 특이한 것은 외부로 향한 부분이 창호지가 아니라 통유리로 되어 있어, 카페 어디에 앉아 있든 마당이 눈에 보이는 구조라는 점이다. 엔틱 한 디자인이 한옥과 잘 어우러져 ‘감성’이 충만한 곳이었다.


따로 메뉴판에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디카페인 원두도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카페인에 민감해서 주말에도 커피를 피한 지 좀 되었기 때문이다. 잠들 걱정 없이 맛있는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유와 에스프레소를 섞어 라테를 만든 후에 위에 크림을 얹은 스타일로 주문했다. 아인슈페너의 크림 농도가 생각보다 진해 커피와 한 번에 입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달콤한 크림이 맛있어 반쯤 마시고는 아예 커피와 섞어버렸다. 딱 기분 좋게 맛있는 달달이 커피다.


<해로 커피> @haerocoffee
서울 성북구 성북로 19-3 1층
11:00-22:00
디카페인 아인슈페너 6500원




14:10 성북예술창작터 (목소리의 극장)


해로 커피를 가는 길에 발견한 갤러리인데, 카페 내부에도 포스터가 붙어 있어 눈길이 갔다. 목소리의 극장이라니, 미술과 목소리가 어떻게 작품으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입구로 들어가자 팸플릿과 함께 내 목소리를 작품에 넣는 방법을 적은 안내문을 받았다. 커튼을 제치고 들어간 첫 번째 공간은 파란 불빛이 점점이 퍼져있고, 가운데에는 공 몇 개가 끊임없이 기계를 따라 움직이는 작품이 놓여있었다.


공의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를 녹음한 후에 기계에 올려놓으면 공이 굴러가며 반복해서 목소리를 재생하는 것이었다.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재생이 되는 줄은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바로 머릿속에서 나온 말을 내뱉었다. “오늘 카레 맛있었다, 커피도~” 오늘 하루 여정의 짧은 감상이 (심지어 내 목소리라 끔찍하게 어색했다) 공이 굴러감에 따라 작아졌다 커졌다 하며 반복 재생되었다. 이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직원 분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는 1층과 똑같이 생긴 공이 끊임없이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는 네모난 판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판자가 움직이니 동그란 공이 따라 움직인다. 어찌나 공이 많이 움직였는지 공에서 묻어난 까만색이 하얀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가니 내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도망치듯이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친구는 배를 잡고 계속 웃었다. 친구가 웃으니 나도 웃었다. 웃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전시였다.


<성북예술창작터>
서울 성북구 성북로 23
월, 일 휴무, 10:00-18:00
관람료 무료




14:30 성북선잠박물관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독특한 외관을 가진 건물을 발견했다. 성북선잠박물관이다. 아까 성북동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선잠단’이라는 유적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에 관련된 건물이다. 신기하게도 우리 조상들은 기우제를 지내듯이 누에로 비단을 짜는 일에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것도 왕실 전통 행사 중 하나였다. 누에 농사가 잘 되라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바로 선잠단이다. 선잠박물관에서는 어떻게 제사가 이루어졌는지,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고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설명하는 상설 전시가 있고, 특별전시로는 금박에 관련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누에로 비단을 짠 옷은 귀한 옷이라 왕과 왕비의 옷을 짓는 데 사용되었고, 비단 위에는 진짜 금으로 금박을 새겨 넣었다. 금박을 옷에 입히는 과정은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무늬를 나무 혹은 금속으로 만든 틀에 새기고, 그 틀에 풀을 묻혀 비단에 찍는다. 풀이 마르기 전에 얇은 금박 종이를 풀 자국 위에 올리고, 풀이 묻지 않은 부분을 조심스레 털어낸다. 그렇게 작은 문양이 비단에 새겨진다. 그 과정을 몇 번씩 반복해서 패턴을 이어지게 한다. 현대의 장인이 금박 작업을 하여 완성한 왕과 왕비의 옷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과정을 알고 보니 더 감동스러운 작품이다.


<성북선잠박물관>
서울 성북구 성북로 96
월 휴무, 10:00-18:00
관람료 1000원





15:20 다시 주차장으로


뜨거운 태양 아래서 끊임없이 돌아다녔던 즐거운 여름날이었다. 우리가 왔을 때 반쯤 비어있었던 공영주차장은 만차가 되어 있었다. 차 문을 활짝 열고 열기가 빠져나가길 기다리면서 많이 웃고 맛있게 먹고 텁텁하지 않은 땀을 흘렸던 오전을 반추했다. 전시 하나, 식당 하나만 정해놓고 온 성북동은 의외의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일상에서 만나면 괴롭기만 한 가파른 경사도 여행의 요소가 되니 그저 재밌는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아직 여름이 지나기 전에 푸른 하늘 아래 지글지글 타오르는 성북동의 거리를 한 번쯤 즐기시길 바란다. 땡볕에 있다가 먹는 커피 맛이 정말 꿀맛이다.


<성북동길 공영주차장>
서울 성북구 성북동 230-20
연중무휴
30분 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