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을 잡아보겠습니다
팜프라는 농촌을 뜻하는 팜(farm)과 인프라를 뜻하는 프라(infrastructure)를 합친 말로, 판타지 촌라이프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인프라를 만드는 곳이다. 어릴 적 세계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유지황 대표는 10여 년 전 국내/해외 14개국을 돌며 청년농부를 만나러 농업여행을 했다. 그리고 자본 없이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보려고 시도한 끝에 농촌에서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집을 짓는 '코부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언제든 트럭에 실어 이사할 수 있는 '나만의 집'을 짓는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농촌에 살아보고 싶거나,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여러 청년들이 함께 모여 지금의 팜프라촌이 만들어졌다.
현재 팜프라촌은 영리화를 위해 워크숍을 통해 지은 코부기를 정비하여 민박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여름 헬퍼로 한 달간 일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업무는 주로 객실 청소와 기타 업무로 나뉜다. 손님들은 금산의 아름다운 모습 아래에 있는 농촌마을에서 하루,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촌라이프를 만끽한다. 체크아웃 시간인 아침 열한 시가 되면 유정 님과 함께 청소 카트를 끌고 나가 숙박동 앞에 세워두고 청소와 물걸레질, 주방 청소와 정리, 그리고 이불 정리를 한다. 그동안 유정 님은 욕실 청소를 도맡아 한다. 보통 객실은 적으면 한 개, 많으면 세 개 정도 정리한다. 보통 두 시간 정도 걸리니, 하루 세 시간의 업무시간 중 2/3는 객실정리를 하는 셈이다.
나머지 한 시간은 기타 업무다. 나는 그 시간에 라운지를 정리하거나, 빨래를 개거나, 간단한 손님 응대를 하거나, 아무튼 객실 청소 외의 다른 일을 한다. 오늘은 그 시간에 처음으로 텃밭 정리를 해보았다. 유정 님의 표현에 따르면 '방치농'이다. 나는 '자연에 순응하는 농법'이라고 정정해 보았다. 콘크리트 틈으로 내어 둔 삼각형 모양의 땅엔 각자 취향에 맞춘 작물들이 심겨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말이다. 나름대로 나무팻말로 식물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양분이 가득한 흙 위에는 이제 잡초라 부를만한 식물들이 무성했다. 사실 잡초가 어딨겠는가. 그냥 인간이 정한 땅에 원하지 않는 식물이 자라나 있으면 잡초라 불리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이 통제하고파 하는 자연이니 우리는 잡초를 제거하기로 했다.
팔 양쪽에 토시를 끼고, 바닥에 앉아도 옷이 상하지 않도록 푹신한 깔개를 엉덩이에 장착하고,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쓰고, 양손에는 농사용 장갑을 낀 후에 낫을 들었다. 살짝 녹슬어 있기는 했지만 풀을 베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낫이다. 유정 님이 "이것만 빼고 나머지는 뿌리 가까이에서 베어주세요"하는 가이드를 듣고 열심히 따라 해보았다. 농사에 대해서라면 기획과 디자인, 운영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 시키는 대로 몸을 쓰는 것은 제법 잘하는 편이다. 베어낸 식물들은 옆에 잘 모아두었다가 베어낸 자리에 그대로 잘 깔았다. 땅에서 수분이 날아가지 않게끔 보양해 주는 '멀칭'을 잡초로 하는 것이다.
뭐든 각 잡아 놓는 걸 좋아하는 건축가의 직업병 덕분에 이불 정리도 좋아했지만, 다음 날에 다른 손님이 다녀가면 또다시 정리해야 하는 알 수 없는 순환의 고리에 빠져있었다. 적성에도 맞고 보람차긴 하지만 성과가 길지 않은 작업이다. 그래도 지난 1월에 팜프라촌에 방문해서 3박 4일간 깨끗한 방에 머물며 행복해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손님들도 그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각을 잡고 바닥을 청소하고 있다. 텃밭 정리는 그런 면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가 일정 기간은 유지되어 뿌듯한 작업이었다. 작업 메이트인 고양이들도 아주 귀여웠다. 텃밭에서 돌아다니는 걸 노는 것으로 인식하는 고양이들이, 인간들이 텃밭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자꾸 오가며 훈수를 두었다.
일을 마치고 잠시 방에 들어가서 쉬다가, 이번에는 30분 거리의 서상리마을에 사는 꼬막 님을 만나러 갔다. 꼬막 님은 뮤지션으로, 남해에서는 카카카친구들이라는 문화예술 단체 대표로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다. 남해는 마을마다 동네 분위기가 다른 게 흥미롭다. 서상리마을은 서면사무소가 있는 면소재지로 제법 큰 규모지만, 남해읍과 너무 가까워 빨대효과를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치 서울과 인천의 관계 같다. 아무튼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는 서상리 마을의 풍경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꼬막 님은 카레 가게인 '오를라섬'의 초대 셰프이기도 한데,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각종 채소를 넣은 맵지 않은 마라샹궈와 함께 라이스페이퍼로 감싼 버섯을 튀긴 버섯탕수까지 해주셨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집에서 구이도 볶음도 아닌 튀김을 해주다니 대체 뭘 부탁하려고 그러냐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자두가 나오더니, 갑자기 크림치즈와 자두청, 견과, 말린 살구를 섞어 와인플래터를 뚝딱 만든다. 황송한 대접이다. 먹는 음식마다 너무 맛있다. 신나서 무알콜 맥주를 세 캔이나 비웠다. 무알콜도 그만치 마시니 사알짝 알딸딸한 기운이 올라오는 듯하다. 그래봐야 진짜 맥주 한 캔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리고 중요한 일을 부탁받고 왔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잘 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