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광주에서 요아정 먹어요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 정도면 보통인데, 이곳에서는 한 시간 걸린다고 하면 엄청나게 멀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게 실제로 이동하는 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울 내에서는 이동거리가 길어야 15km지만, 여기서는 한 시간이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30~40km는 움직일 수 있다. 속도가 빠르니 기름은 쭉쭉 닳는데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 것 같다. 아무튼 그래도 서울에서 전남을 가는 것보다야 남해에서 전남을 가는 게 가깝다.
나에게는 영광군에 사는 친구가 있다. 내려온 김에 한 번쯤은 유나 언니(가명)와 만나 놀기로 했는데, 가운데 어디선가 만나기로 하고 도시 이름을 주욱 보다가 광주광역시에 눈이 갔다. 생각해 보니 출장 가느라 광주송정역에 들른 적은 많아도 광주 자체를 관광한 적은 없어서 언니에게 제안했다. 언니는 초중고교를 다 광주에서 다녔는데, 졸업하고 난 후에 거의 20년 동안 시내 구경을 한 적이 없단다. 언니는 추억여행 겸, 나는 관광 겸 함께 가기로 했다.
광주는 시내가 거의 지하철로 다 다닐 수 있어서 1913 송정역 시장 근처에다가 주차를 해놓고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거나 걸어 다니기로 했다. 고속도로를 따라 달려 두 시간 반 정도만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경험한 도시운전자들의 공격적인 운전 스타일에 놀라며 공영주차장을 찾아 차를 세웠다. 원래는 햄버거를 먹어볼까 했는데 영 속이 불편해 그냥 시장에서 국밥을 먹기로 했다. 언니가 지난번에 친구가 와서 먹어봤다며 데려간 그 집은 몇 년 전 내가 출장 때 들른 집과 같은 곳이었다. 뜨끈한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행여나 이따가 식빵이 다 소진돼서 없을까 봐 맛있다는 빵집에 들러 식빵을 두 덩이 챙겼다. 팜프라촌 식구들에게 광주 간 김에 뭘 사다 줄까 물었더니 식빵을 부탁했었다. 아무래도 한식이야 다양하게 먹을 곳이 많다지만 빵은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은 편이다.
밥을 먹은 후에는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투리를 디자인 요소로 삼은 브랜드가 눈에 띈다. 역서사소라는 곳인데, 특히나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카드들이 눈에 띄었다. "맨-나가 당신만 생각난디 뭐땀시 근다요", "보고자퍼 죽겠당께 시방 그짝으로 간다잉", "내옆에 찰떡맹키로 뽀짝뽀짝 붙어 있으랑께" 등등이 쓰여있는 걸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이렇게 귀여워하는 것도 서울말 쓰는 사람의 심리인가 싶기도 하다.
이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차례다. 광주송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광주 시내를 가로질러서 문화전당역에 내렸다. 신기했던 것은, 지하철에서 가장 긴 자리 하나가 통째로 노약자 배려석으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노인이 많아지는 지방도시에서는 인구 변화에 대한 대응을 이런 방식으로 차차 진행하고 있다. 문화전당역에 내렸는데, 아쉽게도 옛 전남도청사는 복원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었다. 분명 지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큰 건물이 없어서 의아해하던 찰나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그 아래 녹지공간을 발견했다. 기존의 전남도청사를 돋보이게 하고 주변환경(콘텍스트)을 고려한 설계다. 설계 콘셉트는 기념비가 아닌 기념비. 건축은 우규승 건축가가 설계하고, 조경은 정영선 선생님의 서안에서 설계했다.
문화전당 안에 있는 도서관과 어린이 시설이 좋다는 얘기를 듣고 갔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바로 라라브릭의 팝업스토어였다. 브릭에 직접 페인팅하는 체험활동을 할 수 있고, 물감을 던지며 놀 수도 있다. 유나 언니는 다음 주에 조카들이 온다며 사진을 찍고 정보를 메모해 갔다. 어린이들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좋다.
바로 그 옆동에 도서관과 박물관이 있다는 팻말을 확인하고 이동했다. 건물을 둘러싼 금속 프레임은 햇빛에 따라, 쓰임에 따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신기했다.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앞에 스탠드가 있었는데, 스탠드 사이마다 틈과 함께 푹신한 깔개가 깔려있어 어린이와 방문한 방문객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혼자 공간을 찾은 손님들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도서관 내부 공간도 재밌는 포인트가 많았다. 책장 사이사이에 네모나게 쿠션을 대어 안락하게 책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두었다. 가운데 스탠드를 둘러싸고는 책을 읽거나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어 꽤 많은 시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하 공간으로 구성된 건물이다 보니 천장 중간중간마다 천창이 있어 자연광을 들인다. 천창도 아래에서 블라인드처럼 덮을 수도 있고, 밤에도 자연광이 있는 것처럼 조명을 켤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이용자의 입장에서 섬세하게 짜인 건축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도서관을 다 둘러본 다음에는 전시를 찾아 이동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답게 전시는 다국적 아시아 작가들의 작업으로 채워져 있었다. 출신과 배경에 따라 작업에 그 색채가 묻어난 게 흥미로웠다. '이음지음'은 '도시의 경관: 연결과 공존'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는데, 아시아의 도시경관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재밌었던 건 정해진 자리에 서 있으면 그 사람의 체형과 키, 스타일 등을 분석해서 인공지능(AI)으로 그 이미지에 맞는 도시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온통 까만색으로 입고 간 나는 무채색으로 나왔고, 알록달록 밝은 색으로 입고 간 언니는 사찰의 단청 색깔처럼 나왔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도자기 전시도 하나 있었다. <길 위의 도자>라는 전시였는데, 영문명을 보니 도자기 작품을 하는 이주민들에 대한 내용이다.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다양한 국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도예작품을 볼 수 있었다. 작품들 중에는 특히 스티븐 영 리라는 작가의 작품이 흥미로웠다. 한국계 미국 도예가인데, 한국 백자나 청자에 미국 팝 컬처를 적용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벽면에 붙어 있는 7개의 동그란 도자 접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토끼 캐릭터와 켈로그 호랑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는데, 양력으로 하면 토끼띠, 음력으로 하면 호랑이띠인 작가를 나타냈다는 설명을 보고 진짜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다.
문화전당에서 나와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전일빌딩이었다. 광주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꼭 가보라며, 정말 민주항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좋은 전시였다고 추천했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로 포격한 흔적이 남은 곳이다. 현재는 문화공간 겸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 9~10층에 5.18 기념공간이 있는데, 총탄의 자국이 남은 걸 보고 그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그에 맞선 용기를 헤아려보았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그 당시 광주 시민들의 일기가 놓여 있었다. 위대한 누군가의 말보다도, 그날 하루를 기록한 보통 사람들의 말에서 현장이 더 생생하게 와닿았다.
우리 어머니도 광주에서 일한 적이 있고, 언니의 어머니도 광주에 계셨었다. 어머니를 통해 광주에서는 5월에 다들 가족 누군가의 제사를 지내고, 도시의 분위기가 암울하게 바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기에 도시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억울하게 잃은 사람들의 슬픔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잊어서도 안되고, 잊을 수도 없는 역사적 기억이다.
광주 구시내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전일빌딩 맞은편에 있는 광주충장로우체국이었다. 언니가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매번 만나는 장소로 선택한 곳이란다. 시간이 흘러도 바뀐 게 없다고 신기해했다. 어딘가는 너무 많이 바뀌어서 놀라고, 어딘가는 너무 그대로라 신기하고. 추억여행이란 그런 건가 보다.
지나가다가 공유자전거 "타랑께"를 발견했다. 지역말을 담은 이런 센스가 귀엽고 귀하다.
한참을 돌아다녔더니 시원한 게 먹고 싶어졌다. 서울에서도 유행하는 음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괜히 농촌에 살아보니 핫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간다. 최근에 트위터(현 X)에서 2024 상반기 유행음식 이미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두바이 초콜릿, 요아정, 아망추, 생과일하이볼, 크루키, 킨조젤리, 동결건조젤리, 깨먹는 티라미수, 점보라면, 이렇게 아홉 가지가 그려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중 하나도 먹어보지 못했다. 언니도 마찬가지란다. 딱 보기에도 다들 끔찍하게 달아 보여서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이렇게 입맛이 바뀐 티가 나나보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은 꽤 좋아하는 편이라, 언니랑 요아정을 먹어보자고 했다.
마침 다음 목적지인 무각사 근처에 요아정이 있어 먼저 들르기로 했다. 막상 도착하니 배달 전문점이라 그냥 바로 주문해서 들고 나왔다. 조합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저것 다 담으면 5억 원쯤 나온다고 해서 살짝 긴장했었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그래놀라, 골든키위, 벌꿀을 넣었다. 원래 망고도 넣었는데 너무 비싸길래 화들짝 놀라서 빼버렸다. 매장에서 5분쯤 걸어가니 5.18 기념공원이 있었다. 공원 자체는 조성된 지 오래되었지만 언니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정비가 잘 이뤄졌다고 했다. 벤치에 앉아 초록색 잔디밭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니 꿀맛이다. 아참, 꿀이 들어있었지.
아이스크림은 1인분만 담았는데 제법 배부르다. 쓰레기통을 찾아 쓰레기를 처리하고 무각사 쪽으로 향했다. 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다. 언니한테 부처님과 롱디 하는 기분은 어떠냐며 장난을 치는데, 그런 장난마저 허허 웃어넘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마음이 넓고 유쾌한 사람 중 하나다.
무각사는 도심 내에 있는 흔치 않은 사찰로, 옛날에는 전통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으나 현대적인 양식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 무각사가 있는 곳은 예전에 여의산이었는데, 1994년에 도심개발이 진행되면서 그 일대가 5.18 기념공원으로 명명되었단다. 무각사 현판이 있는 일주문을 지나니 오른쪽에 현대적 건물 위에 전통 한옥 양식의 건물을 얹은 불교회관과 불교문화 건물이, 왼쪽에는 금속으로 깔끔하게 만든 연꽃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과 불교회관 사이로 걸어가면 바로 앞에 사천왕문이 나타난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대웅전과 요사채가 나온다. 전통적인 사찰의 구성인 일주문, 사천왕문, 대웅전 등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이 건물도 아까 문화원 건물처럼 현대건축물 위에 한옥 양식의 법당을 얹었다. 올라가는 계단 양쪽으로는 제법 멋진 수형의 나무와 조형물이 보인다. 대웅전은 다포 양식의 화려한 지붕이 단청색 없이 깔끔하게 올라가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내부에도 전통 양식인 듯 현대적 디자인인 듯 화려하지만 촌스럽지 않고 깔끔하게 디자인하여 시공했다. 무엇보다, 보통 사찰은 경사로가 없거나 불편하게 되어있는데 여기는 최대한 단차를 없애고 배리어프리(barrier free) 디자인을 적용한 점이 눈에 띄었다.
대웅전 아래에 있는 건물에도 법당 두 개와 법회를 열 수 있는 강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깔끔하게 마감된 건축물 안에 법당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어두울 수도 있는 공간에 중정을 내어 자연광을 최대한 들였다.
무각사를 마지막으로 다시 광주송정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에 시장에 들러서 참기름과 김부각을 샀다. 팜프라 식구들과 나눠먹을 소중한 양식이다. 언니랑 같이 주차장으로 가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차를 타고 떠났다. 언니 덕분에 즐거운 도시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 둘 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신작 <러브 라이즈 블리딩>을 보고 싶어 했는데, 언니는 근처 도시에 개봉하는 곳이 없다고 아쉬워했었다. 즐거운 여행을 한 기념으로 언니에게 영화 한 편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와 폭풍검색을 해봤더니 광주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한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광주여행 와서 꼭 들러보라는 후기가 달려있는 영화관이다. 언니에게 영화관을 알려줬더니 정말 좋아했다. 최고의 선물을 한 것 같아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