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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Jul 13. 2024

나 반나절만 유배 갔다 올게

구운몽과 서씨남정기의 산실, 김만중의 노도를 찾아서

남해의 마을들은 기본적으로 배산임수 지형이다. 산지가 많은 남해의 특성상 남해를 한 바퀴 도는 도로는 산을 끼고 산복도로의 형태를 하고 있고, 마을은 도로에서 내리막으로 이어져 있다. 어느 마을이든 도로를 등지고 주욱 걷다 보면 앞에 파란 바다와 섬들이 나타난다. 두모마을 또한 마찬가지다. 산복도로에서 이어진 경사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오면, 저 멀리 파란 바다 위에 커다란 섬 하나가 떠 있다. 바로 유배문학의 산실로 불리는 노도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의 섬으로, 문학의 섬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트래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요 며칠 두모마을에 틀어박혀 논문 작업을 했더니 좀이 쑤셔서 걷고 싶던 참에 마침 노도 생각이 났다. 전날 검색을 하다가 바로 옆 벽련마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서 나왔다.


벽련항에서 8시 반 배를 타고 나가려고 홈페이지에 있는 주소로 찾아갔더니 작은 통통배 하나가 '노도호' 이름을 달고 서 있다. 현금으로 왕복 뱃삯 6,000원을 계산하고 자리에 앉았다. 7월 내내 장마라는데 남해가 빨래가 안 마를 정도로 굉장히 습하기는 해도 비가 시원하게 내린 것은 여태 손에 꼽는다. 오늘은 유난히 해가 쨍쨍하고 하늘이 파랗다. 챙이 큰 모자를 꾹 눌러썼다. 섬에 놀러 가기 좋은 날씨다.


노도호 운행시간 및 탑승위치 : https://www.namhae.go.kr/depart/Index.do?c=DE0504060000



배는 10분 만에 노도에 도착했다. 그만큼 남해에서 가까운 섬이다. 아까 배에 탈 때 혹시나 하여 계신 분들께 쭉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배에서 내리는 나에게 어르신 한 분이 문학관에 왔냐고 물으신다. 그렇다고 했더니 거긴 이따가 여니까 먼저 저 위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가란다. 바로 떠나는 줄 알았는데, 둘이 쑥덕쑥덕하더니 나보고 운동을 했냐고 한다. 이것저것 했지요~ 했더니 사이클을 했냐고 묻고, 그렇다 했더니 농구를 했냐고 묻는다. 농구는 안 했다고 했더니 "내 말이 맞지!" 하고 옆에 앉은 어르신한테 껄껄 웃는다. 둘이 내기라도 한 모양이다. 다리 튼튼해 보이는 나는 그렇게 두고, 어르신 두 분이 카트를 타고 먼저 떠났다. 남해는 작은 동네라 이렇게 길가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은 정보를 주고 가곤 한다. 인터넷에서는 알 수 없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정보들이다.



그런데 저 위에가 어디일까? 어르신들의 길 안내법인데, 들으면 도통 모르겠다가도 일단 따르면 신기하게도 정말 그 위치에 내가 원하는 장소가 나온다. 경주에서도 시장에서 우엉김밥을 사려는데 시장 할머니께 여쭤보니 쩌 가서 우회전 우회전 좌회전 하면 나온다는, 다소 해리포터 세계관의 길안내를 해주셨는데 놀랍게도 정말 그렇게 가니 내가 원하던 김밥집이 눈앞에 나타나 놀란 적이 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느낌 가는 대로 눈앞의 오르막을 오르니 <노도문화관>이라 적힌 번듯한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어르신 둘이 타고 간 카트가 그 앞에 세워져 있었다. 들어가니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된단다. 얼음컵은 500원인데 어르신이 하나 뽑았다며 그냥 주셨고, 디카페인 옵션까지 있는 캡슐커피는 한 잔에 1000원이다. 천천히 커피 마시고 올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어르신은 귀신같은 속도로 공간을 청소하고는 카트를 타고 사라졌다. 노도도 남해와 마찬가지로 산지로 이뤄진 것은 마찬가지라, 오르막을 조금 걸어 올라왔는데도 문화관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뷰를 바라보며 잠시 멍 때리다가 편지를 쓰고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빈속에 시원한 커피를 마시니 위장까지 시원한 기분이다. 



문화관에서 나와 마을이 있는 큰길을 따라 걸었다. 길은 하나뿐이라 길을 헷갈릴 염려도 없다. 그런데 갈림길과 함께 표지판이 나타났다. 한쪽은 김만중이 살았던 초옥으로, 한쪽은 김만중의 허묘로 가는 길이란다. 아까 선착장에서 어르신이 허묘는 별로 볼 게 없다고 한 것 같았는데,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묘니까 올라가면 전망이 좋겠지 하는 기대감에 끝을 모르는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저 위에까지만 올라가면 될 줄 알았는데 "한 세트 더!" 하는 트레이너 선생님처럼 한 세트의 계단이 또다시 나타났다. 이미 한 계단을 올라왔는데 그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갔더니 둥그렇게 놓인 돌무더기와 함께 허묘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노도에 와서 3년간 유배생활을 마친 끝에 숨진 김만중은 처음에 이곳에 묻혔다가 육지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전망을 기대하고 갔는데 바다 방향은 죄다 키 큰 나무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고목으로 둘러싸인 묫자리가 자연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어 보기 좋았다. 나무 냄새를 실컷 맡으며 다시 계단을 걸어 내려가 이번에는 초옥 방향으로 걸었다.



가는 내내 나무가 우거졌지만 한 번씩 바다와 남해가 보였다. 마을길은 두모마을과 마주 보고 있어, 멀리서 건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두모마을 어디쯤을 보고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예전에 섬 여행을 했을 때에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그저 다른 섬이었는데, 이곳에 보름쯤 머물렀다고 제법 익숙한 형태들이 보여 반갑다. 길 끝에 나타난 것은 김만중 문학관이었다. 배에서 만났던 어르신이 문학관 1층에 마중 나와 있었다. 바로 앞에 우물터를 보았냐고 하신다. 김만중이 생전에 물을 길어마셨다는 우물터인 모양이다. 봤다고 외치고 문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학관 1층에 들어갔더니 땀 흘렸으니 앉으라고 자리를 가리키고는, 영상을 틀어주겠다고 하신다. 김만중 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김만중의 생애와 노도로 유배 오게 된 계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김만중은 평생 유배를 세 번 떠났는데,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에게 반대하다가 마지막으로 노도에 오게 되었다. 노도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3년 만에 숨졌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 안에 쓴 한글소설 두 편이 바로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이다. <사씨남정기>는 장희빈을 모델로 쓴 시대비판 소설이고, <구운몽>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 문학관 2층에서는 두 소설의 실제 판본과 함께 어르신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이곳의 유일한 관광객은 나뿐인 것 같다.



12시 배를 타야 한다는 얘기를 남기고 긴 설명을 해주신 어르신께 감사인사를 드린 후에 문학관에서 나왔다. 아직 볼 곳이 많이 남아있다. 문학관 뒤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김만중이 살았던 자리에 만든 서포초옥이 나온다. 서포는 김만중의 호다. 세 칸짜리 작은 초가집이지만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는 남부러울 게 없는 풍경이다. 두모마을의 방파제가 보이는 바다 풍경을 뒤로하고 계속 언덕을 올랐다.



언덕 위에는 야외전시장이 있는데, 각각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주인공들을 스토리텔링 방식에 따라 동상으로 구현해 놓았다. 문학관에서도 전시가 의외로 볼 것이 많고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놀랐는데, 이곳의 정원도 제법 멋지다. 처음에는 주인공 소개가 있고 그다음으로 이야기의 각 장면이 이어진다. 동상을 둘러싼 조경도 각 장면에 맞춰서 조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여름이라 초록색 나무들이 싱그러워 기분이 좋았다. 이야기를 따라 정신없이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산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그냥 길을 따라 올라갔으면 끝까지 올라가진 못했을 텐데, 이게 바로 이야기의 매력인가 보다. 전망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구운몽>의 동상들


<사씨남정기>의 동상들


야외전시공간에서 내려와 다시 문학관 앞으로 갔더니 안내해 주신 어르신이 저쪽으로 새로 정비한 길이 지난주부터 열렸다고 알려주신다. 마을길은 두모마을을 향해 있는데, 새로 만들었다는 길은 섬 뒤쪽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처음에 웬 코코넛매트가 깔린 엄청난 오르막이 나와서 한참 숨을 골랐는데, 간간이 보이는 바다 풍경과 잔잔한 파도 소리와 시원한 숲길이 계속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다. 계곡소리가 아닌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걸었던 적이 있던가? 처음에 넓었던 길은 점점 좁아지고 오르막이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내리막이 되며 마지막에는 다시 넓어졌다. 



길 끝에 있는 것은 작가들을 위한 노도작업실이었다. 창작프로그램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글이 술술 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꿈같은 노도에서의 반나절짜리 유배를 뒤로 하고, 다시 남해로 돌아갈 시간이다.



간만에 보는 파란 하늘에 마음마저 들뜨는 것 같다. 웬일로 산 꼭대기까지 맑게 보여, 팜프라촌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원래는 오후 1시부터 근무가 있었지만 일정이 조정되면서 오후 시간이 붕 떴다. 밤에 있을 인터뷰 전까지 시간이 아주 많다. 간만에 생긴 여유 시간인데 바다에 발을 좀 담그고 싶어졌다. 이럴 때는 오아시스지. 또 가서 또아시스다. 잠깐 방에 들러 잠시 누워서 쉬다가 짐을 챙겨서 나왔다. 잠시 앉아 책을 읽고 쉬는데, 워크숍을 마친 팜프라촌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친구도 있겠다 자리에 짐을 그대로 두고 카메라만 챙겨서 해변으로 걸어갔다. 


슬리퍼를 계단에 벗어두고 맨발로 포슬한 모래를 밟았다. 좀 더 걸으니 단단한 모래가 발을 받친다. 파도가 밀려와 발목까지 적신다. 바다를 휘적휘적 걷는 내 모습을 유정님이 찍어서 보내주면서 덧붙였다. "이제 남해사람 다 됐네요~" 


두모마을 팜프라촌의 모습


요즘 최애 카페 오아시스와 송정솔바람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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