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해" 죽는 것보다 "같이" 사는 게 힘들면.

그래도 같이 살아줘라

by Romantic Eagle

차라리 목숨 바쳐 그 사람을 살리는 게

그리하여 같이 살아내야 하는 앞으로 보다

쉬운지도 몰랐다.



말 그대로

위해 죽겠다는 말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만큼 삶이 겪어내야 하는 시공간의 파도가

죽어서 보상하려는 짧은 고통을

능가하는 인내와 질투 등의


감정이 조장하는 불편한 그 무엇을

끊임없이 보장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어느 시각이었다.



너무 좋은 그 사람도

내 사람만이 아닌 공간에서는

남보다 낯선 사람이 되었고,



꼭 익숙한 사람이 보장하는 상처가

덜 아픈 것도

덜 익숙한 사람이 보상하는 웃음이

덜 진실된 것도 아니었다.


상대적인 것의

절대적인 잣대를 찾다 보면

그 항구 좌표 (3,5) 정도의 자리에

세계 맥주 4 캔을 사서 한 캔도 못 마시는

어느 삼십 대 여자 아이가

버드와이저 정도 되는 도수를 보장하는

카스에 빨대를 꽂아 몇 모금 마시다가

훔쳐내는 눈물로 인해

쓰디쓴 맥주가 살짝 짜게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막 우는 것 같다가

방금 업데이트된 유튜브 영상을 보며

막 웃고 있는 것이다.




막 울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두께의 얼굴을 가질 때 즈음이면,

그 때문에 자존심을 굽힐 줄 몰라

놓쳐야 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지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익숙해버려서 친해진 타인이

꽤 진부해진다.



취하고자 술을 열면

그리하여 깨야 하는 술이 무거워져서

술 병을 놓는다.


커피도 세 잔 째 정도 되면

그만할 줄 알아야

내일 또 마실 수 있고,


살도 덜 찔 정도로 먹어야

내일 한 끼 정도는 맛있다고

인식되는 음식을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리하여 살아냈던 시간으로 인해

조금 편해진 것들이

만만해지고,

그리하여 불편해진 몸이

무서워진다.



하던 말들이 지겨워져서

말을 마는 게 귀 편했다.


하지 않던 말은 들어줄 사람이 없고,

들어줄 사람이 없음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인생이 안타까운 방식으로

나의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익숙한 타인의

나를 익숙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하루 이틀을 내어주고는 했다.



사는 게 뭐냐고.

묻다가

이 질문을 할 정도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음을 깨닫고는


선선한 저녁

캔 맥을 따서 얼큰하게

마시다 보면 도착하는 치킨에

나보다 먼저 실실거리며 웃는

저 사람을


내일도 볼 수 있는

특권이


내가 선택한 적 없이 태어나

그네들처럼 살다가

내가 선택한 적 없이 죽을

이 세상이 내게 줄

아주 일반적이고

아주 평범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이 생각에 정착하려고

지금까지 살았다면,

다시 태어나도

너를 만난다는 보장만 있으면

매일 죽고 싶다고 일기를 쓰던

내 30 년을 다시 살아내서

너를 만난

그 작년 7월 22일 오후 한 시에

그 자리에

서 있는 너를

다시 만나서 다시 반하고 싶은


2020년 6월의 어느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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