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로그 Dec 02. 2023

스페인의 화약 파티

3월 발렌시아의 하이라이트, 라스빠야스

유럽 축제에 로망이 있었다. 지역색이 묻어나는 역사적인 독특한 축제가 많아서. 고려하던 여행지들 사이에서 관심가는 축제를 찾아 이를 중심으로 여행루트와 기간을 잡았을 정도로 진심이었다.


이번에 축제는 바로, 스페인 3대 축제 ‘Las Fallas (라스 빠야스)’. 사실 '3대 축제'라는 말이 너무 강력해 어떤 축제인지 깊이 찾아보지도 않았다. 키워드인 '불꽃'이 방문하기 전 내 지식의 전부였다.


라스 빠야스 Info.

스페인 동부에 위치한 발렌시아에서 매해 3월 15일부터 19일까지 열리는 축제. 이 기간은 메인 행사일 뿐, 2주 전부터 곳곳에서 폭죽을 터트린다고 한다. 그리고 시청 광장은 물론, 이외의 작은 광장 등에 파예인형들이 설치되고, 마지막 날엔 이들을 모두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로, 이 시기에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이를 즐기기 위해 많은 방문객이 온다. 참, 마지막 니놋 태울 땐 흰색 옷은 피할 것을 추천한다. 재로 인해 더러워질 수 있다.


‘쾅!!!!’

밤 12시가 이미 넘은 밤. 사람이 없는 낯선 거리를 걸어갈 생각에 걱정되는 마음으로 역을 나섰다. 발렌시아 시내의 모습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한산한 거리는커녕, 주변을 둘러볼 정신도 없을 만큼 정신없었다.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건 폭죽 터트리다가 놓치고 도망가는 청년들과 굉음이었다.


“엄마!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인데!”

“주변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악!”

공포감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몰아치는 폭죽 소리 때문에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술 취한 듯 신나게 뛰노는 사람들 사이에서 잔뜩 움츠려 들었고, 불시에 들려오는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에 나는 점점 혼이 나가 소리만 연신 질렀다. 대화가 불가하다는 현실을 깨닫곤 전화를 끊고 호스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파예 인형들


도보 10분. 1시간 같은 10분이었다. 그 사이에 정신은 이미 밖으로 가출하고 없었다. 호스텔에서도 계속 들려오는 굉음에 내가 이 축제에 대해 무엇을 보고 왔나 의구심이 들었다. 이미 새벽인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침대에 짐을 던지고 누워 라스 빠야스에 대한 정보를 다시 찾아봤다.


‘불꽃축제’.

기억 속 정보가 분명 맞는데, 상상하던 그림이 전혀 아니다. 불꽃이라면 밤하늘에 화려하게 수놓은 꽃의 모양이 보여야 하는데. 소리만 들릴 뿐 형체조차 전혀 없었다.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전쟁이 나면 바로 이렇겠구나.’란 생각이 스칠 정도의 소리만 있었을 뿐이었다.


고된 이동 일정에 지칠 대로 지쳤는데도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대화가 필요했다. 이 첫인상에 대한 공감 해 줄 사람과의 대화가. 새벽 3시, 평소라면 모두가 잘 시간이지만, 축제를 즐기러 모두 밖에 나간 탓에 텅 비어 있던 방은 사람의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폭죽 터지는 소리에 마음의 구멍만 커져갔다.


시청 앞


유일한 목적이었던 축제 마지막 날 당일. 밤에 목격한 것들을 생각하니 하루 없는 날 취급하고 싶었지만, 바보 같이 제 발로 찾아온 경험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수십 번 나를 설득하며 길을 나섰다. 축제의 시작은 추로스와 쵸코라떼. 좋아하는 간단한 식사로 본격적인 스페인 여행의 문을 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너덜너덜 해진 종이에 담긴 추로스를 들고 시청을 향해 걸었다. 자연스레 인파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통제된 거리 앞에 섰다. 바리케이드 앞에 서 주변을 살펴보다 직감적으로 행사가 있음을 느꼈고, 좋은 자리를 위해 그 상태 그대로 자리 잡았다. 옆엔 버선발로 뛰어나와 명당에 자리 잡은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MASCLETA(마스클레타)’가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예정시간은 14시, 3시간이나 남았다. 쌀쌀한 날씨에 이 긴 기다림이 가치가 있을지 궁금해 검색해 봤다.


'마지막 날 낮의 하이라이트'

'방독면이 있어야 할 거 같았다'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평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방독면'이라는 단어가 너무 강력해 두려움이 커졌다. 그들의 후기에 의하면 제일 앞에서 보는 사람들은 흩날리는 재 때문에 숨 쉬기 힘들다는 것.


그제야 축제의 실체를 알았다. 말이 좋아 불꽃놀이지, 이 축제는 ‘화약파티’다. 이 날을 위해 화약을 만드는 장인도 있다고 하니 더 확신이 생겼다. 전날 밤의 굉음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공포감에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3시간에 상상공포 속에서 버티고 그 굉음을 혼자 이겨낼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마침 동행의 연락도 온 상황.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급히 이동행렬에 합류해 탈출했다.


퍼레이드


해가 지면 불꽃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니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된다.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거리의 폭탄 같은 굉음의 폭죽 소리는 잦아졌고, 위에서 불시에 콩알탄을 밑으로 던지기도 하며, 아이들 마저도 라이터를 손에 쥔 채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 행사는 불을 다루는 행사이지만, 아이들도 예외 없이 직접 참여를 한다. 안전 문제는 괜찮은지 걱정이 될 만큼의 장면도 꽤나 보인다. 어떤 한 가정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게 되었는데, 아이가 폭죽이 담긴 상자라면서 작은 나무 박스 속 여러 종류의 폭죽을 자랑하더라. 이들의 삶은 어릴 적부터 불꽃과 함께하는 듯하다.)


퍼레이드


시작은 퍼레이드. 고지된 시간보다 한참 늦게 등장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만큼 가치 있었다. 전통 복장을 입고 가는 사람들 뒤로, 불쇼를 하는 사람, 불꽃을 든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몇몇은 스카이 콩콩을 신은 채 곳곳을 뛰어다니기도 다. 그들은 구경하는 우리들에게 불꽃이 나오는 막대를 들고 다가와 마구 흔들었다. 온몸으로 사방에 튀는 불꽃을 맞았다. 혹여나 화상이라도 입을까 두려워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뒤로 물러섰다. 이것이 이곳을 온 사람들의 즐기는 방식이다. 무서워도 불꽃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


설마 위험한 걸 사람한테 휘두르겠어? 그냥 즐겨.’

이 생각이 기본적으로 없으면, 이 축제를 편히 즐기기는 쉽지 않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퍼레이드가 즐겁다.


하이라이트 구경을 위한 인파


동행들과 대화를 하며 축제를 즐기다 보니, 예고 없이 굉음을 내던 폭죽소리 익숙해졌다. 가끔 동네가 울릴 만큼의 폭탄 소리가 들릴 때 조금 움찔했지만, 의연하게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퍼레이드가 끝나고 동행을 따라 시청 광장으로 돌아왔다. 축제의 진정한 끝을 향해서. 


이제는 니놋(파예 인형)을 태울 시간이다. 니놋발렌시아인들 여럿이 모여 제작하는 일종의 조형물로, 마을 곳곳에 놓여 있으며, 이 축제가 한층 더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중심에 있다. 축제가 열리기 전에 제작해 투표를 받고, 여기서 1등 한 니놋은 시청 앞에 놓이며, 제작된 모든 니놋은 축제의 가장 마지막에 규모 순서대로 태워버린다.


불꽃 축제답게 태우기 직전에는 수많은 불꽃을 터트린다. 어떤 니놋이든 관계없이 곳곳에서. 시청 앞의 니놋이 가장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인기가 제일 많지만, 그만큼 대기 시간이 상당하다는 단점이 있다. 수시로 터지는 불꽃이 가끔 건물 사이로 보이는 덕 지루할 틈 없이 설렘만 고조됐다. 하지만, 3월의 발렌시아 날씨는 비도 자주 오고 패딩 입을 만큼 워낙 쌀쌀하기에 굳은 의지가 아니면 혼자 와서 버틸 곳은 아닌 거 같다.


발가락이 얼면서 몸은 점점 추워지고,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데다가 예상시간만 있고 정확한 진행시간이 없어서 막연하게 기다려야 했던지라 대기 난이도는 상당히 높았다. 거리가 사람으로 가득해서 이동자체가 힘들어 그 자리를 지킨 것이지, 마음은 수십 번 집을 들락날락했다.


라스빠야스 최고 하이라이트


마침내 시청을 둘러싼 모든 불이 꺼졌다. 사람들술렁대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작은 불꽃이 피었다. 마지막이라고 1년 간 모아둔 폭죽을 몽땅 터트리는 게 아닐지 의심될 만큼, 숨 돌릴 새 없이 불꽃이 한참 터졌다.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을 보니 마음고생 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며 벅찼다.


감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하이라이트 장면이 몰아 나왔다. 불 니놋과 연결되어있던 화약에 옮겨 붙었고, 도미노처럼 화약을 타고 이동해 니놋에 불이 붙으면서 불씨가 커졌다. 하나하나 옆으로 번지는 걸 숨죽인 채 바라봤다. 어느덧 니놋에 붙은 불은, 조금씩 니놋을 태우더니 이내 전체를 둘러쌌다. 옆의 건물 보다 더 높이 불기둥이 솟았다. 꽤나 먼 거리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그 열기가 느껴졌다. 앞에 있던 온도계를 보니 순식간에 5도가 올랐더라. 고기 불판 위에 올라 내가 구워지는 거 같았다. 불길이 가장 셀 때는 그곳을 오래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새삼 그 앞에서 동시에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반대방향으로 물을 뿌리고 있는 소방관들이 대단해보였다.


니놋은 규모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완전히 타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린다. 차차 사라지면서 작아지는 니놋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니놋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다.


사실 이 행사는 호불호가 꽤나 갈린다. 이 지역 출신 사람들도 이 시기에 일부러 장기간 휴가를 떠나기도 한단다. 이 모든 건 글 내내 언급했던 '굉음' 때문. 그래서 발렌시아인들의 청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족한 정보로 첫인상은 두려움만 가득했고 이후에도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뿌듯할 뿐.


새롭고 그래서 또 즐거웠던, 라스 빠야스.

이전 07화 런던에서 버스탑승 시 꼭 확인해야 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