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인 현지인 집으로의 갑작스러운 초대
"지금 여기 빠에야 만든다는데. 드시러 오실래요?"
아직 만나지도 못한 동행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이따가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그 친구 초대해도 된다고 해서요. 점심 안 드셨으면 오세요."
우리의 만남 목적은 라스 빠야스를 함께 즐기는 거였다. 그런데 당일에 약속 시간을 급히 잡다가 동행이 머물던 호스트 가족의 초대를 받아버렸다.
낯선 이의 초대는 위험이 당연히 크지만, 어느 정도 그에 대한 확실한 사전 정보가 있었던지라 그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스페인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인 빠에야의 본고장 발렌시아에서 언제 또 가정식 빠에야를 먹겠는가.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가정에서 먹는 김치찌개를 맛보는 격. 무엇보다 특별했다.
"안녕하세요. 친구 이름이 뭐예요?"
가족 중 첫째 딸 외에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동행에게 나의 이름을 물었다. 방금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해준다?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한국어로 대화를 하면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으니 그 사이 서로를 알아갔다. 그렇게 우린 순식간에 '동행'에서 원래 알던 '친구'가 되었다.
짐을 내려두자마자 나를 곧장 부엌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상상 그 이상 크기의 커다란 빠에야 팬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토끼고기로 많이 먹는데, 우리는 토끼가 싫어서 닭으로 먹어."
한국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은 해산물 빠에야는 빠에야 취급하지 않는 발렌시아. 토끼와 닭만 언급하는 것만 봐도 이들의 빠에야 대한 인식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거는 껍질콩이고, 이거는 또 다른 콩."
관심을 갖고 옆에서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호스트가 친절히 과정을 설명해줬다. 언어 장벽은 중요치 않았다. 하나하나 재료를 보여주며 아이에게 알려주듯 말했다.
거실에선 강아지와 남편이 놀고 있었다. 우리는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이 가족과 대화를 이어갔다. 남편은 가정적이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꽤나 긴 빠에야 조리 시간 동안 그의 쾌활함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식전으로 이거 먹어봐. 매울걸?"
매운맛 초리조를 줬다. 스페인의 매운맛 좀 보라면서. 한입 먹은 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웬만한 한국인은 매운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안 매워?"
"전혀!"
"근데 너도 아침에 매운 면 먹니?"
우리의 모습을 보고 황당해하더니 갑자기 나한테 뜬금없이 매운 면을 먹냐고 물었다. 알고보니 아침부터 라면 먹는 동행을 보고 가족이 모두 놀랐던 것. 이렇게 그동안 있었던 그 가족과 동행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제 쌀 넣고 물 붓고, 30분 기다리면 돼."
빠에야는 생각보다도 더 오래 걸리는 음식이었다. 식당에서 빠에야가 유난히도 더 오래 걸리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재료들이 어느 정도 조리되는 동안 이미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 그제야 생쌀을 넣는다. 생식이니 또다시 익히는 시간. 양도 많으니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상상이상의 조리법. 너무나도 익숙한 쌀 요리였지만 조리 과정은 꽤나 낯설었다. 이제야 빠에야 쌀 식감의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아티초크까지 더해 더 졸이고 나서야 마침내 빠에야가 완성되었다. 여섯 명이 두 접시를 먹고서도 더 남을 엄청난 양의 빠에야가.
물론 요리하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가정식의 맛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여기서 먹는 빠에야 맛은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예전에 스페인 관광지를 벗어나면 식당도 짜지 않고 맛있다고 현지인이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짠맛도 전혀 없었다.
어찌보면 이 모든 상황이 나에겐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지만,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들에 그저 행복했다. 모든 사람을 불과 몇 분 전에 만났음에도 어색함도 못 느꼈다. 화목한 가정과 짧은 언어 실력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삶 속으로 녹아드는 순간. 스페인어를 공부하러 떠났던 여정의 의미를 이곳에서 찾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