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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로그 Jan 10. 2024

위기의 인생 첫 타파스

와인 한 잔에 취하는 밤

스페인 여행 2회 차. 일수로는 20일도 넘었지만, 여행 중 타파스를 단 한 번도 안 먹어봤다.


참고로, 타파스는 스페인의 전통 식문화로, 본격적 식사 이전에 먹는 애피타이저다. 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안주 개념으로 통하기도 한다. 소식가인 나에겐 적은 양으로 여러 스페인의 전통식을 먹을 수 있기에 본래 목적과 다르게 다양하게시키는 용도이기도 하다.


소도시에서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서 굳이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할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휴식을 취하던 날이었다. 넓은 방을 혼자서 사용할 기회는 많지 않기에, 지금이 딱 쉬기 좋아서. 종일 방구석에 앉아 블로그를 작성하고, 사둔 간식을 먹으며 사진 편집만 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행에서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건 나의 여행관은 지키고 싶었다. 종일 침대에 누워 지도만 바라보다 숙소 근처에서 찾은 괜찮은 식당을 가기로 했다. 걸어서 5분.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다 곧바로 달려갔다.


식당 외부


오픈 시간에 거의 맞추어 갔지만 이미 식당 내부는 인산인해. 별 것 없는 좁은 골목이었지만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 바로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날은 추웠지만 옆의 난로가 있어서 오히려 몸에 닿는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첫 타파스


메뉴는 미리 봐두었던 화이트와인과 오징어. 맛도 비주얼도 환상적이었다. 스페인 특유의 부드럽고 통통한 오징어살에 달콤 쌉싸름한 와인까지. 싫어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양도 딱 적당하고 맛도 좋은데 이걸 왜 엄마랑 스페인 왔을 때는 생각을 못했을까 싶어 후회하며 먹었다. 입 속 가득 채워 넣은 오징어를 씹을 때마다 만족스러웠다. 위기가 찾아올 때까진.


한창 타파스를 즐기고 있던 때, 취기가 급격히 올라왔다.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몸이 회복이 덜 되었을 때 시킨 이 용감함이란. 무모했지만 한편으론 이 상황이 신기했다. 발밑이 붕 떠 있는 느낌을 처음 받아봐서. 앉아있어도 느껴지니 일어서기가 두려웠다.


'집에 당장 가야하나?'

아직 음식은 절반 가까이 남았지만 고민됐다. 한 번도 취해본 적이 없는 나는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까. 거기다 몸상태도 정상은 아니었고. 역시 생각이 짧았다.


혼자 여행 온 여자가 동양인도 거의 없는 지역에서 술에 취해 길에 쓰러지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상황이다. 정신줄 붙잡고 물을 주문했다.


그리곤 500ml 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곧 다시 깨겠지.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조금 더 보내며 식사를 여유로운 듯 급한 듯 즐기고 나아지는 기분이 들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몸 상태 때문에 주문할지 말지 고민하다 본능적으로 시켰던 와인이 불러온 폭풍에 잠시 놀랐지만, 결과적으로 이 날의 만찬은 여러가지로 의미있었다.


와인 반 잔에 후끈후끈 달아오른 얼굴에 달게 취해 잠든 밤이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을 땐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않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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