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줄곧 시시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나자신이 조연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인생의 빛나는 순간도, 그러지 못한 때도 어쨌든 나는 내 삶의 주연이라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나도 참 속편히 살아왔구나 싶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도 최근에 드디어(?) 조연을 경험했다. 그때도 내가 주연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나서야 조연인 걸 알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주연들이 모두 떠나고 난 후, 밖으로 나가 오랜만에 담배를 피웠다. 바닥에는 버려진 담배 꽁초가 가득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담배에게도 담배 나름의 일생이 있겠지. 구김 하나 없는 하얀 옷을 챙겨 입고, 누군가의 입술에 몸을 붙인 채, 뜨거운 온기를 뿜어낸 적이 있겠지. 그러나 잠깐이겠지. 때가 되면 작고 누래져, 쓰레기통이나 바닥에 버려지겠지. 툭, 하고.
그것말고 담배에게 어떤 끝이 있을까?
나는 스물에 담배를 시작해 서른에 끊었다. 아니,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일 년에 서너번 정도 피운다. 그래서 찬장 위에 뜯지 않은 담배를 하나 꼭 놓아둔다.
뜯지 않은 담배.
끝이 다른 건 아직 뜯지 않은 담배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꽤 쓸쓸하다. 누군가에게 잠깐의 온기와 아픔을 남기고 볼품없이 버려지거나, 영원히 뜯지 않은 담뱃갑에 갇혀있거나. 담배에겐 오직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 거로구나.
글쎄, 그게 정말 선택이긴 한 건지.
나는 할까말까 고민될 때 보통 하는 쪽이다. 예전부터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안하면 찜찜한 미련이 오래 남지만, 하고 나면 후회하더라도 오래가진 않으니까. 어쨌든 끝을 봤으니 툭툭 털어낼 수 있지 않나.
그런데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어떨 땐 그냥 하지 않는 게 낫다. 애초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내가 조연인지도, 작고 누래져 땅바닥에 떨어진 꽁초인지도 몰랐을텐데. 투명 비닐에 쌓인 담뱃갑 안에서 오랫동안 잘 지냈을 텐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아무 일도...
그러나 이 모든 게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다.
내가 만진 것들이 묻어 내 지문이 된다. 그 손가락으로, 나는 또 다른 것들을 만지며 산다. 나도 언젠가, 어딘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를 조연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대체 뭐가 잘났다고 억울한 척일까? 나처럼 이기적인 인간도 이럴 땐 나자신을 애정하기 힘들다. 생각해보면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이미 나자신을 주연으로 상정한 게 아닌가? 어휴.
아무튼 그만두자.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다. 나는 이 소박한 드라마 안에서 작가와 감독의 연출에 놀아나는 한 명의 배우일 뿐이다. 그러니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를 하자. 우울이나 후회 말고, 다정함과 위로를. 그리고 유머를 잃지 말자.
잊지 말자.
경쾌하되, 침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