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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No 어른존: 청아아파트 13단지 마법의 성

by 윤경림 Jan 01. 2025


아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엄마와 나간 데이트가 너무 재미없었기 때문이에요.

동생 소라가 집에 온 후로 엄마아빠는 너무너무 바빴어요. 엄마는 아팠고 아빠는 우는 소라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아무도 아라에게 시키지 않았지만 아라는 아라가 소라를 돌보고 도와줘야 하는 언니라는 걸 알았어요. 아라는 소라에게 쪽쪽이를 갖다 주고, 엄마에게 물티슈와 기저귀를 갖다 주고, 소라가 흘리는 것들을 “으휴~”하면서 다 닦아주었어요. 가끔은 귀찮고 힘들었지만, 뭐. 아기가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아라는 소라의 언니니까 괜찮았어요.

그러다 오늘 아침, 아주 오랜만에 엄마가 아라에게 데이트를 하러 가자고 했어요. 소라는 아빠와 집에 있기로 했죠. 엄마는 자동차까지 타고 아라와 데이트를 하러 갔어요. 날씨가 아주 좋고, 자동차에선 아라가 좋아하는 음악도 나왔어요. 엄마는 아라에게 아주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했어요.

엄마는 근사한 카페 앞에 차를 세웠어요. 예쁜 2층 집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어요. 엄마는 아라에게, 오늘은 특별히 케이크 두 조각을 먹자고 이야기했어요. 아라는 신이 나서 카페로 뛰어갔고 커다란 유리문을 힘껏 밀었어요.

그런데 턱, 누가 문을 붙잡아 아라를 막았어요.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찌푸린 얼굴로 문에 붙은 종이를 가리켰어요. 아라는 아라 머리보다 높게 붙은 종이를 읽었어요.

-NO KIDS ZONE. 어린이 출입금지.

다른 것은 몰라도 No는 읽을 수 있었어요. 모르는 영어 다음엔 한글이 쓰여 있었어요.

어린이 출입금지.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글이었고 아라는 출입금지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아라는 어린이였어요.

아라가 엄마를 돌아보자, 엄마는 한숨 쉬며 아라를 쓰다듬었어요.

“어쩔 수 없지. 그럼 사서 차에 가서 먹자. 엄마가 들어가서 사올게.”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데, 거기 음식을 사먹는다니?

“엄마, 그냥 가자. 응? 다른 데 가자.”

“여기까지 온 게 아깝잖아. 잠깐만 기다려.”

아라가 몇 번을 더 졸랐지만 엄마는 엄마의 커피와 아라의 케이크를 사왔어요. 두 조각이나요. 아라는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요즘 케이크 값이 얼만데! 아라도 그 정도는 알았어요.

아라는 차로 돌아가기 전 투명한 유리문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어요. 아까 그 아저씨가 다른 어른들에겐 환하게 웃으며 뭔가를 주고 있었어요. 아라는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엄마를 따라갔어요. 얼굴이 꼬깃꼬깃해졌지만 울고 싶진 않았어요. 그건 분노였어요.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그 집의 케이크는 맛도 없었어요! 아라는 숨을 씩씩 내쉬며 집 앞 놀이터에서 내렸어요. 엄마는 늦지 않게 돌아오라며 돌아갔죠. 놀이터에는 친구들이 꽤 많았고 그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어요. 아라가 친구들을 부르며 다가가려 하는데, 무언가가 아라의 다리에 와 닿았어요.

축구공이었어요. 멀리서 공을 놓친 어른들이 걸어오고 있었어요. 아라는 공을 주워 어른들에게 가져갔어요. 어른? 오빠? 고등학생인 친척오빠보다 조금 더 어른인 것 같은 사람들이 아라에게서 공을 받았어요. 그리고 시끌벅적하게 이야기했어요.

“착하네~ 고마워! 오빠가 축린이라 공을 잘못 찼다.”

“하하하! 축구를 그렇게 해놓고 축린이는 무슨, 넌 그냥 축구를 못 하는 거야.”

“되게 작다. 요즘 애들은 다 큰 줄 알았는데.”

“넌 몇 살이냐?”

어른들은 아라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다 곧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어요.

“얜 착하네. 아까 걔넨 다리 좀 맞았다고 성질내고, 울고...”

“요즘 잼민이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어른들이 웃었어요. 그리고 공을 받은 어른이 먼지투성이 손을 아라의 머리 위로 뻗었어요.

아라는 먼지 묻은 손, 이상하게 웃는 얼굴, 무슨 뜻인지 아는 말들을 무섭게 노려봤어요. 어른에게 집중하자 어른의 말이 느리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어요.

“고오오-므아아아-으어어어어-”

아라는 손이 머리에 닿으려는 순간 팔을 휘둘러 빠르게 어른의 손을 쳐냈어요! 그리고 뒤를 돌아 집을 향해 달려갔어요. 얼굴이 또 무섭게 꾸깃꾸깃해지고 있었어요. 속상하고 가슴이 뛰는데, 어쩐지 아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됐어요. 이건 역시 분노였어요.

쾅! 방에 들어온 아라는 침대에 앉아도, 바닥에 앉아도 자꾸 심장이 뛰었어요. 가족이나 선생님은 좋았지만 오늘은 어른이 너무너무 싫었어요. 오늘 만난 어른들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어요. 아니, 사실은 어제 만난 어른도 좀 그런 것 같았어요. 어쩌면 그저께도, 어쩌면 그그저께도.

아라는 예전에 봤던 어른들을 떠올렸어요. 놀이터 그네에 커다란 어른들이 앉아 떠들고 있고, 아라와 친구들은 미끄럼틀과 시소만 타다 돌아와야 했어요. 예전에 봤던 어른들은 아라의 앞을 새치기했어요. 그리고 아라가 기웃거리자 모르는 척 아예 등을 돌리고 섰어요. 그 어른들이 마지막 아이스크림을 사가서, 아라는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어요.

어른, 어른, 어른! 아라가 살아온 평생을 두 번 합쳐도 아라는 어른이 될 수 없었어요. 세 번은 다시 살아야 어른이 될 텐데, 그렇게 아라의 세 배는 큰 어른들이 왜 이러는지 아라는 알 수가 없었어요. 세 배는 어린 아라도 소라와 동생들을 새치기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데, 왜 어른들은 제멋대로인 거지?

아라는 생각했어요.

어른을 내쫓는 공간을 만들자.

어른이 들어오면 문을 막고, 째려보고, 나가게 밀어내도 되는 공간을 만들자. 허락을 받은 어른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야. 어른들이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이상한 어른들이 우리 걸 뺏지 못하는 공간을 만들자.

보통 어린이라면 의자를 모아 아지트를 만들었을지도 몰라요. 놀이터 모래를 쌓아서 만리장성을 쌓았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런 건 어른이 툭 치면 망가지잖아요? 어린애 장난이라면서, 귀엽다면서 어른들이 어린이의 분노를 비웃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아라를 화나게 한 어른들은 전혀 몰랐겠지만, 사실 아라는 보통 어린이와 달랐어요. 아라는 똑같이 어른들을 화나고 섭섭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요.

아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마법사였거든요. 평범하게 자라길 바라는 엄마아빠 때문에 얌전히 살고 있었는데, 이젠 한계였어요. 이번만큼은 아라의 진짜 힘을 써서 해내는 수밖에 없었어요.

아라는 마법지팡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고 놀이터엔 아직 집에 가지 않은 어린이가 반, 슬슬 다가와서 벤치, 시소나 그네에 앉아 수다를 떠는 어른이 반이었어요. 아라는 어린이와 어른의 가운데, 놀이터 중간에 서서 지팡이를 쳐들었어요.

어른은 아무도 들어오지마!”

아라가 크게 소리치자 지팡이가 하얀 빛을 내뿜었고, 곧 놀이터가 꾸물거리며 변하기 시작했어요. 놀이터는 갑자기 커다란 성으로 변해서, 어린이들은 안으로 들여보내고 어른들은 뻥, 발로 차서 바깥으로 내보냈어요. 미끄럼틀과 구름다리, 쳇바퀴가 있는 놀이기구가 부풀어 올라 멋진 성문이 달린 건물이 되었어요.

펑! 폭죽과 함께 사탕비가 내리자, 단지 안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이 놀이터 성으로 달려왔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린이들은 궁금했지만 빨리 사탕을 주워야 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아라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성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성 주변에 무서운 울타리를 만들었어요. 울타리는 어린이만 들여보내주고 어른들은 주변에도 못 오게 뾰족한 못으로 콕콕 찔러댔어요.

곧 성 안에선 마음껏 뛰어놀고, 마음껏 과자를 먹고, 눕고, 오르고, 떨어졌다가, 또 올라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과자방, 티비방, 게임방, 피자방...

아라는 풍선놀이터처럼 출렁이는 성 안에서 다이빙하듯 떨어지고 또 뛰어올랐어요. 성 안에는 신나는 음악도 틀어져 있어서 아라와 친구들은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정신없이 뛰어놀았어요. 배부르게 먹고 엄청 자기도 했고요. 그런데 해가 지고 밤이 되자, 바깥에선 어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한 시간이 넘게 같이 놀던 아이들은 엄마아빠의 전화를 받고 한 명, 두 명, 성을 나가기 시작했어요. 내일도 또 놀자, 약속했지만 울타리 밖에 서있는 엄마아빠들의 표정은 성을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마지막 친구까지 나갔을 때, 이상한 삐용삐용 소리가 들려 아라는 까치발을 하고 창문 밖을 내다봤어요.

헉, 빨갛고 파란 불빛. 형광조끼를 입은 경찰들과, 오늘 많은 어른들, 그리고 아라의 엄마, 아빠가 서 있었어요. 아라는 어른들 사이에, 오늘 봤던 싫은 어른들이 껴있는 것을 봤어요. 똑같이 아라를 본 엄마가 이제 나오라고 손짓했지만 아라는 모른 척 등을 돌렸어요. 곧 엄마에게 전화가 왔지요.

“아라야, 이제 집에 가야지.”

“난 이제 여기서 학교 다니고 살 거야. 집에도 가긴 할 거지만, 난 여기가 더 좋아.”

“그래도 거기서 어떻게 혼자 살아. 엄마가 뭐 섭섭하게 한 거 있어?”

“...엄마는 없어.”

“그럼 왜 그래? 이건 다 뭐고. 아라는 이런 데서 살고 싶었어?”

“밖에 있는 어른들이 없으니까 여기가 훨씬 좋아. 이상한 사람도 없고, 들어오고 싶어 하는 어른들도 못 들어오고...”

“어른이 없는 공간도 당연히 필요하지. 하지만 아라야, 잠은 집에서 자야 하는 거야. 이 성은 엄마가 잘 알아서 할 테니까, 오늘은 집에 가면 안 될까? 없애라고는 안 할게.”

아라는 다시 창문 밖을 봤어요. 아라를 본 엄마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엄마, 그럼 이거 경찰아저씨한테 말해줘. 그리고 종이에 써서 규칙으로 붙이게 해줘.”

아라는 뭔가를 속닥속닥 말했고, 엄마는 급하게 종이를 빌려 받아 적었어요. 잠시 뒤 경찰아저씨가 나팔 같은 마이크로 말했어요.

“아라야, 다 썼다. 이제 그만 나오렴!”

무거운 성문이 열리고, 마법지팡이를 든 아라가 나왔어요. 엄마는 기쁘게 아라를 안아주고 어른들이 한창 돌려보고 있는 종이를 받아 놀이터 안내판에 붙였어요.     

-어른의 규칙-

1. 어린이가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해줍니다. 어린이가 가는 길을 막지 않습니다.

2. 어린이가 노는 곳을 빼앗지 않습니다. (특히! 어린이 놀이터!)

3. 어린이의 머리를 함부로 쓰다듬지 않습니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4. 이상한 별명으로 어린이를 부르지 않습니다. 존댓말도 써주세요.

5. 어린이를 너무 미워하지 않습니다. 친절해주세요.     

놀이터 주변에 서 있던 어른들은 규칙을 한 번씩 읽고 돌아갔어요. 그 중엔 아라가 오늘 본 어른들도 있었는데, 어른들은 그제야 미안해요 하면서 아라에게 사과했어요. 아라는 삐죽거리는 입은 아직 넣을 수 없었지만, 앞으로 조심하세요, 하고 용서는 해줬어요.

마지막으로 경찰이모가 앞으로 이곳에서 규칙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하겠다고 말하자 아라는 그제야 입을 집어넣고 웃었어요.

“그런데 아라야, 저 성은 그대로 둘 거니?”

“좀만 더 놀고, 지겨워지면 정리할게요.”

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칫한 경찰아저씨가 정중하게 악수를 요청했어요. 아라는 의젓하게 손을 잡고 흔들었어요.

드디어 모두가 돌아가고, 아라는 엄마아빠의 손을 잡았어요. 집으로 걸어가며, 아빠가 말했어요.

“우리 아라가 저렇게까지 마법을 잘 쓰다니, 커서 대장 마법사가 되려나봐.”

“나중에 소라가 크면 저런 걸 한 번 더 만들어줄래?”

엄마가 말했어요. 아라는 양손으로 엄마아빠를 잡고, 아빠에게 안겨있는 소라를 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어요.

“그러죠, 뭐!”

아라의 목소리 뒤로, 근사한 깃발이 인사하듯 팔락였어요. 아라는 생각했어요.     

내일은 뭘 하고 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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