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모 Jun 07. 2024

안심하지 말라고 자네

독일라이프 2화. 네가 나에게 똥을 줘도 금으로 만드리라

"엄마~ 입국 첫날 사건 이후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 숙소도 너무 좋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모든 게 완벽해!"


독일에 온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 처음으로 엄마에게 보이스톡을 걸어 잘 지내고 있으니 딸 걱정은 하지 말라고 전했다. 베를린 중심가에 계약한 아파트먼트는 위치나 컨디션이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이곳 단지에 사는 세대 전체를 관리하는 하우스 마이스터도 날 좋게 보는 듯했다. 희끗한 머리를 질끈 묶은 그에게서는 터프함이 폴폴 풍겨져 나왔는데, 내가 입주날 수리 요청한 부분들을 그날 바로 해결해줬다.


예컨대 뻑뻑한 발코니 문 손잡이를 새걸로 갈아주고 한쪽이 잘 열리지 않는 침대 아래 수납장도 멀끔하게 고쳐놨다. 원래 독일인들은 귀찮은 일을 피하거나 세월아 네월아 걸린다던데 운이 좋게도 괜찮은 분이 당첨됐다.


"Alles gut?" 그는 내 방문을 나서기 전 한번 더 물으며 체크했다. 말할까 말까 쭈뼛거리다가 화장실 변기 물이 살짝 느리게 내려가는 것 같다고 했다. 망설인 이유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문제 삼는 성가신 입주민으로 낙인찍히기 싫어서였다.


하루 전인 입주 첫날에는 수압이 원래 이런 줄 알았다. 그런데 괜히 나중에 문제가 생길까봐 슬그머니 불안해졌고, 변기가 막혔을 때 직방이라는 제품을 혼자 마트에서 사와 넣어봤는데도 뭔가 시원치 않은 듯한 상황이었다.


하우스 마이스터는 변기 물을 내려보더니 다음날 아침 8시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삐이이-!!!' 하루가 지나 오전 8시가 되자 칼같이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변기에 어떤 화학제품 같은 걸 넣었고 한시간 후에 물을 내리면 완벽하게 잘 내려갈 거라고 말했다.


둘은 고마움과 뿌듯함을 서로 나눠가진 채 훈훈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시간 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변기 뚜껑을 열었다. '으응...?' 변기는 안쪽부터 커버까지 새까맣게 변색돼 있었다. 뚫는 효과가 좋은 만큼 성분이 강해서 그런가 하고 물을 내렸다.


맙소사. 변기 물이 차올랐다. 막혔구나. 사진과 영상을 찍고 독일어로 이 상황을 번역해 적은 후 관리실을 찾아갔다. 하우스 마이스터는 뚫어뻥을 비롯해 물품을 챙기더니 내 방으로 다시 향했다. 그렇게 해서 해결됐다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


일전에 문제 있는 시설물을 뚝딱뚝딱 듬직하게 고쳐냈던 그도 변기 앞에 속수무책이다. 변기 물은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차올랐고 끝내 하우스 마이스터는 항복했다. '역시 모든 게 완벽하긴 뭘 완벽해. 인생이 그럴리가 없지.'


그나마 좋은 소식은 그가 수리회사 직원을 불렀다는 점. 나쁜 소식은 언제 올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어제 막 개통한 나의 독일 핸드폰 번호를 받아가며 수리공이 오면 바로 콜하겠단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자기도 장담할 수 없다면서.


오늘중 올 수도 있고 내일로 넘어갈 수도, 며칠이나 몇주가 걸릴 수도 있는 상황. 만약 오늘 고치러 왔는데 내가 없으면 안되니 집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엄마와 전화를 끊자마자 변기 물을 내린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술관을 가려던 나의 계획은 날아갔다.


하우스 마이스터는 볼일이 급하면 관리실 화장실을 쓰러 오라는 친절함을 베풀었지만 초반부터 그런 이미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독일어도 전혀 못하는 주제에 인간의 기본 욕구인 배설욕을 참을 만큼 아직까진 체면을 차리고 싶은 걸.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린지 10시간째. 이쯤 되면 수리회사 직원들도 퇴근했겠구나 싶었다. 다행히도 당장 화장실이 급하진 않았으나 나는 원래 아침에 눈뜨자마자, 밥이든 간식이든 무언가를 먹으면 곧바로 화장실을 가는 인간이다.


당장은 견딜만해도 한밤중에 용무가 급해지면 큰일이다. 어제 장을 보러 갔던 베를린 이케아가 떠올랐다. 이케아에는 화장실이 무료로 개방돼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30분 내외 거리에 위치하고 영업시간도 오후 9시까지라 시간이 조금 남았다.


어제 한번 가봤다고 헤매지 않고 빠르게 찾아갔다. 이케아 화장실 변기에 앉은 순간 드라마틱한 해소(?)을 기대했건만 아침부터 참아서인지 오히려 아무런 신호가 없었다. 계속 앉아있어도 시간만 흐를 뿐 마찬가지였다. '온 김에 뭐라도 좀 제대로 나와라..!!'


나의 장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화장실을 나와 어제 다 못 샀던 실내용품들을 마저 쇼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따뜻하고 두툼한 이불담요와 행주, 가위, 화장실 청소도구를 사왔다. 다 필요했던 것들이다. 그래, 뭐든 얻어가는 게 있다.


집에 돌아온 후에는 물 빠져나가는 구멍이 없는 화장실 바닥을 청소하느라 한차례 애를 먹었지만 적지 않겠다. 이러면서 더 강해지고 삶의 노하우가 생기는 거겠지. 나처럼 매 순간 처음 겪는 상황을 자식들을 위해 대차게 헤쳐왔을 엄마아빠 생각이 많이 났다.


지금은 변기 수리를 기다린지 꼬박 24시간째. 금요일인 오늘이 지나가면 주말이니 당분간은 고치러 올 가망이 없겠군. 말로만 듣던 독일 사람들의 일처리를 이렇게 겪게 되는구나. 뭐든 빨리빨리 해결하는 한국인에겐 악명 높은 이 느려터짐.


오히려 좋다. 잘됐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서 고생했던 나인데, 이번 기회에 자연 치유됐구나 생각하고 있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면 그 역경을 나의 편으로 만들어야지. 이것이 내가 삼십대에 갖게 된 능력이다.

작가의 이전글 불사신 불나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