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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리 Apr 10. 2023

인생의 어떤 순간

한 단계를 넘었을 때 위로와 격려가 된 멜로디

드디어 어린이집이라는 곳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동네의 인기 국공립에서는 대기번호 50을 넘긴 숫자를 받았고 그 정도면 대략 일곱 살쯤에나 연락이 올 거란다. 집 근처 가정 어린이집은 움직임 많은 아이가 다니기에는 좁아 보였다. 물론 당시 내 기준에 아쉬운 면이 있었을 뿐 넓고 좋은 가정 어린이집이 많다.


거리가 멀어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직장 어린이집. 연락이 왔기에 한번 보기나 하자며 갔는데 공간의 온기와 선생님들의 밝음이 눈에 들어와 무거운 고민을 안고 돌아왔다. 제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있던 회사 동기들의 격려가 더해졌다. 남편과 며칠을 전전반측 앓듯이 따져 결국 무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어린이집은 가까운 곳이 최고라는 말에는 지금도 백번 동의한다. 누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그럴 필요 없다며 말릴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나. 안 보면 안 봤지, 다 보고 마음에 들어온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복직하면 아이가 긴 시간을 보낼 곳이기에 가족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곳을 택하고 싶었다.


결정을 저지른 후부터 운전 초보는 밤마다 내비 앱을 켜 가상주행을 했다. 서울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경로, 막히면 40분이 넘는 거리. 나는 아침마다 출전의 각오로 비장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백미러를 아이에게 맞추고 온 신경을 집중해 페달을 조심히 밟고 뗐다. 좁아지는 차선에서 빨간 신호등은 어찌 그리 긴지, 내 차를 막고 우회전하는 버스는 왜 또 그리 많은지. 콩순이, 뽀로로 음악과 영상을 틀어주고 높고 명랑한 톤의 말들을 일방적으로 거는 내 마음을 아빠빠 엄맘마 정도 말하는 18개월 너는 아는지. 길어지는 신호에 아이의 불편이 울음에 가깝게 변할라치면 나도 소리 없이 입술을 깨물 따름이었다.


그렇게 초보는 더 이상 초보가 아니게 되었다. 안전 초집중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최적 경로를 최대 효율로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필사의 과제였다. 아이의 칭얼거림에 비하면 운전이란 어려움을 논할 일이 아니다.




적응기간에는 엄마들이 30분, 1시간 정도씩 근처에서 대기하다 데려갔다. 왔던 거리와 노력이 허탈한 시간이지만 십수 개월의 붙박이와 비교하면 어찌나 귀하고 신이 나는지. 비슷하게 지친 안색의 친구와 바로 옆 빵집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거리고 스콘을 뜯으며 사람답게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사막의 오아시스가 아니라면 뭔가.


어느 날 선생님께서 오늘은 낮잠까지 재울 수 있을 것 같으니 집에 다녀오라신다. 이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으면서 막상 어리둥절하다. 첫째 때의 경험이 있는 친구가 내 등을 떠밀며 아이는 걱정 이상으로 잘 있다 하원하게 될 테니 얼른 집에 가서 한숨 자란다. 다시 또 한참을 가고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집에 있다 오는 게 훨씬 낫단다.


처음으로 홀로 고요한 차에 올라탔다. 최소한 35분 정도의 시간은 아무런 쫓김도 조급함도 없이 운전할 수 있다. 아이의 기분과 상태를 살피려 억지로 말하고 달래지 않아도 되고 백미러도 뒷차만을 향해 정확히 맞출 수 있다. 주행시간과 예상도착시간을 수시로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느지막이 가거나 아예 딴 길로 새도 된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스피커에서 유아를 위한 멜로디가 흘러나오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 아니라면 그 무엇이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라디오를 켰는지 스트리밍 앱을 켰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출발 후 바로 접어든 교차로에서 신호대기를 할 때야 비로소 제대로 들린 영화 <라라랜드> OST 인트로.


경쾌한 리듬과 청량한 목소리. 이내 마음에 뜨겁고 까만 모래 알갱이 같은 것들이 파도처럼 덮여 안긴다. 지나온 모든 것이 서러우면서 황송하다. 선물 같은 상황에 마른 웃음이 난다. 못 믿을 적막 속에 오롯이 나만을 위한 소리가 흐르는 차 안. 그리고 때마침 신나는 멜로디. 창 너머 보이는 오전 햇살과 어처구니없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나. 휴직 후 멈춰 있던 세계인 듯했는데 밖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걸어 다닌다. 인근의 대로 풍경들이 낯익고도 낯설다. 에잇, 이 언니 노래 정말 잘하네. 요즘 나오는 노래들은 다 이렇게 좋은가. 청승맞게 눈물이 난다. 누가 보면 사연 많은 사람인 줄 알겠네.




출산 이후 가장 빠르게 사라진 것은 단연코 음악이다. (잠과 같은 생존 영역은 제외하고 말이다.) 잠 깬 아이 소리와 초인종 소리에 예민해져 침묵과 고요가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아무렇게나 틀어도 되는 라디오나 아이의 주의를 끌 동요를 간신히 찾았다. 그래서 아이가 커 가며 가장 반갑게 돌아온 것 역시 음악이다. 반갑다, 다시 찾은 나. 하물며 운전까지 하게 된, 강해진 나.


몇 년이 지나고도 생각나는 내 인생의 어떤 장면, 어떤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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