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한 것들의 기록 (2)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길. 어쩌다 눈에 닿은 놀이터는 늘 빈 공간이었다. 무용해 보였다. 그래서 주차 공간이 부족해 놀이터를 없앴다는 어느 아파트의 소식마저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은 잊은 지 오래다.
이제는 안다. 아파트 내 놀이터 뿐만 아니라 생활체육 기구 몇 개가 있는 도보권의 작은 공원마저 보배롭다는 것을. 놀이터는 아이들이 무언가를 오르내리고 타고 노는 곳 이상의 공간이다. 오전에는 가정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함께 나온 서너 살 아가들이 아장거린다. 오후부터는 다양한 나이의 어린이들이 하굣길에 들르고, 학원 사이사이 한 번씩 거쳐간다. 아는 얼굴을 찾아 뛰고 모르는 얼굴도 자주 보아 아는 얼굴이 된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고 두 뺨이 벌게지도록 깔깔이며 논다. 다치거나 아웅다웅하느라 짧은 울음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주말 아침에는 줄넘기 연습을 하는 아이 곁 아빠들을 보기도 한다. 이렇게나 살아 숨 쉬는 공간. 나에게 없고 모르는 것이라 하여 모두에게 없는 것이 아니었다. 놀이터가 없으면 아이들이 뛸 곳이, 양육자들이 설 곳이 너무나 좁아진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새로운 장소의 두 번째 발견은 소아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원. 예전에는 집을 구할 때 역, 직장, 학교와의 거리 정도만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낯선 동네에서 소아과가 영 보이지 않을 때, 어린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빠르게 짐작한다.
힘이 넘치는 아이들이지만 아플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쓰러이 약해진다. 자라는 과정의 필연인 것인지 심장이 쿵 내려앉게 아픈 일이 생길 때가 꼭 있다. 응급 상황도 종종 벌어진다. 그때마다 우리 집이 ‘소세권’에 있다는 것이 그 어떤 역세권보다 감사하게 느껴진다. 호두 알러지를 처음 발견했던 날 얼굴이 부어오르는 아이를 안고 뛰었다. 고열에 시달려 축 처진 아이를 업고 간 적도 여러 번이다. 예방접종 시기는 또 어찌나 자주 돌아오는지. 동네 소아과 의사 간호사 선생님이 가족의 주치의처럼 느껴진다. 놀란 마음을 앞에 두고 별일 아니라는 듯 무던한 말투가 섭섭했던 적도 잠시, 이제는 친근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동네 소아과마다 주말 아침이면 대기가 한세월이라는 소식에, 소아과 폐과 위기 뉴스에, 우리 아이들은 어쩌나 싶어 눈앞이 깜깜해진다.
좀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백화점은 그동안 가장 크게 오해한 곳이 아니던가. 나는 한때 그곳에서 마주친 유모차들을 육아의 고상한 여유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곳은 부모가 사치하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집 밖을 나서고 싶은 부모가 젖먹이 아기를 데려가기에 그만큼 안전하고 편리한 외출 장소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 모유수유를 할 때 외출이란 막막함을 넘어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졌다. 수유 가리개, 수유 원피스가 있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분유수유는 준비물도 더 많다. 앞서 아이를 낳은 지인에게 묻자 덤덤하게 말했다.
“백화점을 가는 수밖에 없지. 어쩔 수 없을 때는 화장실에 가서 먹인 적도 있어.”
나는 안전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청결한 유아휴게실에서 맘 놓고 기저귀를 갈 수 있다. 갑자기 젖이 불거나 아이가 배고파 울어도 난처하지 않게 수유실을 찾을 수 있다. 유모차를 먼저 타게 해 주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당연히 백화점의 마케팅 방식이다. 이런 발걸음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를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되고 보니 충분히 지불 가능하다고 느껴진다. 어딜 가도 혹 환영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유아 동반자에게는 친화적인 환경만으로 만족스럽다.
대형 쇼핑몰도 마찬가지다. 전국에 아름다운 나들이 장소가 많은데 왜 아득바득 주차장 입구부터 줄을 서는 곳에 가는 걸까 생각했다. 역시 이면에는 고단한 사정이 있다. 백화점보다 넓은 이곳은 좀 더 큰 아이들을 둔 부모들까지도 끌어안는다. 다양한 키즈카페, 장난감 코너에서 하릴없이 지갑을 여니 쇼핑 업계와는 상부상조다. 주말 이른 오전부터 이미 하얗게 질린 부모들이 가득하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남편이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켜 즐길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동지의식 때문이다. 이 집 저 집의 복사 후 붙여 넣기 같은 풍경을 보다 보면 힘듦은 내려놓고 너털웃음만 짓게 된다.
여기에서 연간회원권의 발견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놀이공원이나 아쿠아리움의 연간회원권을 끊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다. 놀이기구나 수족관에 단단히 미친 사람이거나 집이 코 앞인 사람이리라. 과거의 내 개념 속 ‘사람’에 ‘유아’ 또는 ‘유아 동반 가족’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63 빌딩 아쿠아리움 연간회원권을 끊는 사람이 되었다. 결제와 동시에 안도감과 기쁨이 몰려온 사람 말이다. 회원 주차권까지 넉넉하게 받아 마치 큰 이득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봤던 것을 또 보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안전하게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할 뿐이다. 바깥에 나가야만 하는 아이, 안 나가고 싶지만 그렇다고 진짜 안 나가면 그것대로 버거운 부모에게 연간회원권은 경제와 합리 그 자체다. 세상의 비즈니스 모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공급은 수요가 있어서 생긴 것이다. 몰랐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발견한 크고 작은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 그중 으뜸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계절의 발견이다. 나는 학창 시절 지독한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했는데 특히 여름이면 증상이 더 심해졌다. 그래서 여름을 싫어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한 아이를 키우는 어른이 되었다. 문 밖을 잠시 나설 뿐인데 두꺼운 옷을 겹겹이 껴 입히고 돌아오면 또 겹겹의 옷을 벗겨내야 했다. 그런 겨울이 지겹도록 길다. 그러다 서서히 런닝과 팬티 차림으로 집을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공기가 찾아온다. 제법 먼 외출에도 옷과 짐이 가볍고 물놀이만으로 놀잇감 고민이 옅어진다. 걱정 없이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있는 계절, 자유로운 놀이의 계절. 그래서 여름이 좋아졌다.
다른 이유도 있다. 직장 어린이집 셔틀버스가 사옥 앞으로 오던 매일의 저녁을 기억한다. 정시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 엄마라는 딱지 때문에 사무실 문을 나서는 발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분주한 그리움을 안고 만난 아이들의 표정은 깜깜한 겨울에 유독 어둡다. “우리 엄마는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같은 시간의 여름, 아이들은 해가 지지 않은 밝음 속에 엄마 아빠를 만난다. 그 기쁨만으로 한없이 해사하다. 길어진 해가 선물이 된다.
그래서 알았다. 적어도 아이를 키우는 지금의 나에게 참계절은 여름이라는 것을. 시원한 초록과 땀 흘린 후 샤워와 에어컨과 수박 따위의 낭만을 말하기 전에 매우 현실적인 편리함을 겪었기 때문이다. 열대야에 열린 창 너머 배달 오토바이 소음을 막을 길이 없고 모기에 물린 아이가 자꾸만 잠을 깨지만, 어디 완벽한 계절이 있겠는가. 여름이면 되었다. 오래 미워하기만 했던 계절의 반짝임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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