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취향,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어머님께서 공룡 피규어가 가득 담긴 통을 사 오셨다. 새 장난감은 반지르르한 위용을 뽐내며 거실에 펼쳐졌다. 아이는 잠시 만지작대며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장난감을 찾는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니 어머님도 나도 영 멋쩍다.
“이맘때쯤 공룡을 좋아한다던데 이상하네.”
일생에 공룡 지식이 해박해지는 시기가 단 두 번 있다고 들었다. 첫 번째는 본인이 다섯 살일 때, 두 번째는 자식이 다섯 살 때라고 말이다. 낙타 등처럼 두 번 오르내리는 곡선 그래프를 분명히 보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다른 아이들은 브라키오사우르스, 트리케라톱스 같은 이름을 몇 십 개씩 거뜬히 왼다던데.
“아직 관심이 없나 봐요. 친구네 아이도 일곱 살 때 좋아하게 됐대요.”
왜 그 시기가 반드시 한 번은 오리라 생각한 걸까.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도 없는데. 다수의 취향이 필수의 취향은 아니다. 다섯 살이 지나고 여섯 살이 지나도 공룡은 남의 나라 얘기.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선풍기를 좋아했다. 날개 회전이 좋았던 건지, 길에 보이는 에어컨 실외기에도 눈을 못 뗐다. 세탁기와 건조기 내부 원통이 회전하는 시연도 사랑에 빠지는 데 일조한 모양이다. 마트와 백화점 전자제품 코너를 지나가기 쉽지 않았다. 작정하고 안아 올리지 않으면 한 시간을 족히 넘길 기세.
산책할 때마다 높고 낮은 실외기를 가리키는 숨은 그림 찾기를 했다. 매일 다니던 거리에 언제부터 그렇게 많은 기기가 있었나. 손끝에 “응, 응” 소리만 닿던 18개월 꼬마는 차츰 “이거, 이거” 소리를 더했고, 말문이 트이자 힘차게 “시래기!”를 외쳤다.
세 돌이 되고 사랑은 아롱다롱 여물었다. 선풍기 철망과 날개를 분리해서 씻는 것을 본 이후엔 연신 재연을 요청하며 울어댔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모든 선풍기를 꺼내 뜯어준 날이 있다. 아이는 여태 본 것 중 가장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근차근 부품을 살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존재가 다른 것과 사랑에 빠진 눈을 지켜보는 것 또한 행복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가전제품 덕에 SAMSUNG과 LG라는 알파벳을 알고, 에너지소비효율등급 덕에 1과 2를 처음 말했다. 낯선 취향을 급히 따르던 엄마는 종이와 펜만 보이면 선풍기 그림을 그리고 질문에 답해야 했다. 과학 유튜버 설명을 찾아 들어봤지만, 기계에 일절 관심 없는 문과 부모는 지금까지도 베르누이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기로서의 핸드폰에 마음을 둔 적도 있다. 가족들의 핸드폰 겉면을 살피다 회사마다 기종이 다르고 주기적으로 새 제품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질문 폭격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은 역시나 ‘없는 것이 없는 유튜브’. 전문가들은 기종별 특징과 역사를 속시원히 설명해 주었고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탐색을 이어나갔다.
가족들 핸드폰이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 카메라는 얼마나 툭 튀어나와 있는지 조잘댔다. 주인이 기억 못 하는 버전명을 숫자에 플러스까지 더해 대답해 주었다. 갤럭시 브랜드 음악인 ‘Over the horizon’이 연도별로 다름을 알게 된 아이의 요구로 그 곡을 무한 재생하며,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어쩌다 또 여기까지 와 있지?
일상이 이렇게 채워지다 보니 사연을 아는 지인들은 안부를 줄곧 취향으로 물어 왔다.
“요즘도 윤이는 선풍기를 좋아해?”
대답이 바뀌었다.
“아니, 이제는 엘리베이터를 좋아해.”
다섯 살이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좋아하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건물 엘리베이터를 다 타보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외출 후 무거운 발을 이끌고 현관문 앞에 섰을 때면 꼭 쭈뼛거리며 말을 꺼내는 아이.
“엄마, 107동 엘리베이터 딱 한 번만 타고 오면 안 돼?”
한숨이 푹. ‘다음에 가자’와 ‘지금 가자’의 대결이 펼쳐진다. 체력이 달린다는 핑계로 쪼잔해지는 엄마 아빠다. 어쩌다 조부모님 돌봄을 받는 날이면 아이는 나비처럼 신나게 엘리베이터를 타러 다녔다. 제한도 논쟁도 없이 자유롭게.
집 안 모든 미닫이 문이 엘리베이터로 바뀌었다. 벽과 창에는 '손대면 끼임 위험, 기대면 추락 위험' 그림과 버튼이 어지럽게 붙었다. 퇴근한 나를 맞는 아이는 곧장 “띵, 1층입니다. 문이 닫힙니다.” 하며 상황극에 돌입했다. 엄마 스위치가 급히 켜진 나는 현관 중문에 갇혀 몇 층인지 모를 도착 안내 멘트를 기다렸다.
아이는 안내 음성, 버튼 모양, 전광판 표시 형태와 같은 것들로 제조사를 맞추곤 했다. 어른들마저 엘리베이터 회사 이름을 줄줄 읊게 된 것 또한 그 산물이다. 스테고사우루스와 프테라도논의 차이를 알고야 마는 다른 부모들 심정이 이것이리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것.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던가. 일 년 넘게 차지한 마음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앉은 것은 대구 할머니댁에서 3호선 지상 모노레일을 탄 후부터다. 여섯 살 아이는 지하철에 푹 빠져들었다. 폰 화면 속 노선도를 자꾸 보여달란 통에 크게 인쇄하여 코팅된 것을 구해 주었다. 밤낮을 들여다본 아이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지명만 대면 가장 빠른 환승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전 세계 철도인들이 제공하는 인터넷 속 다양한 정보가 아이를 배부르게 해 주었다. 지역별 특이한 역, 차량기지 위치, 호선별, 차종별 역사를 알게 된 것은 당연하다. 다행히 교통기관은 또래 선호가 제법 있어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한단다. 너희끼리는 대화가 통하기를.
주말 나들이는 목적지 없는 지하철 여행으로 채워졌다. 가보지 않은 경로로 더 많은 노선을 환승하느라 종종 경기도 끝을 찍고 돌아왔다. 평일 지하철 출퇴근만으로 넌더리가 나는 부모는 주말마저 이래야 하는가 싶다. 그러나 낯선 곳으로 향하는 사이 결국 들뜸에 전염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개통일에 맞춰 신림선을 타러 가는 설렘, 비밀 승강장이 있는 역을 찾아가는 재미는 평일 익명 지하철과는 다른 우리만의 특별함이 되었다.
관심이 기차와 버스로까지 확장될 때쯤 아이는 당당하게 정정을 요구했다.
“엄마, 사실 나는 지하철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대중교통을 전부 좋아하는 거야.”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이번에는 지도 속 행정기관을 짚는다. 대중교통 덕에 수도권 지리를 대강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종 역명에 구청은 얼마나 많은가. 서울시 내 모든 구청, 우리가 사는 구 모든 동 행정복지센터에 가 보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못 들은 척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쉬운 고집이 아니다.
마을버스를 두 번 갈아타 연남동 행정복지센터 문 앞에 도착했던 날의 더위는 지금도 생각만으로 아뜩하다. 나는 왜 이 여름 청춘남녀들만이 오가는 골목의 감성 카페 사이에서 미취학 아동을 데리고 셔터 내린 기관의 문패를 찍고 있는가. 유리창에 비친 우리 모습이 무척이나 수상하다. 누구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목적의 여정에 피식대며 아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준다. 이 시기의 행보를 떠올리면 서울의 김정호라도 될 것 같던 아이의 목표가 현실이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빠르게 옅어진 관심에 참으로 감사하다.
같은 여름, 지역 문화체육센터 수업 시간을 착각한 날이 있었다. 붕 뜬 시간을 채울 목적으로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바로 옆 도서관에 우연히 들렀다. 아이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지도 구석구석에 도서관도 있다는 것을. 구청과 행정복지센터는 반복해 찾아갈 이유가 없지만 도서관은 갈 때마다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것도.
이후 우리에게는 도서관이라는 세상이 열렸다. 아이뿐 아니라 나도 기꺼이 찾아 나선다. 모르는 동네에 가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변 도서관을 가장 먼저 검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성곽길 높은 곳에 자리한 한옥 도서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어 책이 많은 어린이 도서관, 재미있는 DVD를 바로 볼 수 있는 숲 속 도서관을 보물처럼 발견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어린이들에게도 공룡과 로봇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있다. 아이가 둘, 셋 있는 집도 제각기 다르다. 아홉 살 꼬마 야구인을 둔 지인 집에는 전 구단 선수별 응원가가 내내 틀어져 있다 한다. 등 번호와 특징을 달달 외우는 것은 기본. 집안 곳곳에 탱크와 기관총 장난감이 가득한 평화주의자 친구는, 제 아들만은 밀덕*이 될 줄 몰랐다며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밀리터리 덕후’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대학시절 본인 취향에 대한 에세이를 써 오라는 과제에서 나는 취향 없음에 대한 글을 써냈다. 남들에게 좋은 게 내게도 얼추 좋은 것이었던 우유부단함 때문이다. 그래서 이토록 호불호가 명확한 아이 취향이 신기하다. 덕분에 나 역시 일평생 모르던 취향에 무심코 올라탄다. 달랐던 이들에 대한 오해를 씻는다. 거리의 숨은 그림을, 지도 속 작은 글씨를 찾는다.
여덟 살의 새 취향은 단연 컴퓨터이다. 입출력장치 연결이 그렇게나 신기한가 보다. 노트북과 HDMI 선을 들고 수차례 거실과 방을 오가며, TV를 포함한 모니터 3개를 당장 연결해 달라는 아이. 육아서와 다르게 현실 엄마 입에서는 꼭 그래야겠냐는 말이 버럭 튀어나온다. 어찌하랴, 좋다는 것을. 이제는 그저 이번 취향은 얼마큼의 크기와 길이로 마음에 머물지 궁금할 따름이다.
아이는 머지않아 다시 시선을 돌리고 맥락을 이어 세계를 넓힐 것이다. 어른 도움 없이 누릴 수 있는 취향들이 더 생겨나겠지. 그러면서 세상 단 하나뿐인 자기 자신으로 커 나갈 것이다. 어린 날들처럼 손잡고 함께 하지는 못해도 몇 걸음 뒤에서 발견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싶다. 아이 취향이 내 취향이 되었듯, 그 기쁨 역시 계속하여 나의 기쁨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