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로 찌개를 끓이면 김치찌개이고 된장으로 찌개를 끓이면 된장찌개이다.
짜장에 면을 비비면 짜장면이고 콩국물에 국수를 말면 콩국수라고 부른다.
특별히 재료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든 칼국수 곰탕 붕어빵 같은 음식 이름이 아니라면 주재료를 그 음식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오늘 저녁으로 먹은 그것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것들과는 이름 짓는 방식이 많이 다르다.
분명히 식재료가 음식 이름인데 실제 그 메뉴의 주재료는 아니다.
'감자탕'은 감자가 들어가는 탕이긴 하지만 분명 주재료는 돼지등뼈이다.
재료들의 화학적 조합이나 셰프들의 특별한 시선으로 보면 감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전 지식 없는 일반인들이 직관적으로 판단하기에 이것은 분명 '돼지등뼈탕'이다.
여럿이 둘러앉아 감자탕 한 그릇 나눠먹을 때도 공평하게 나누는 기준은 감자의 개수가 아니라 등뼈의 개수나 크기로 판단하는 걸 볼 때 이 음식의 주인공은 분명히 감자 아닌 돼지등뼈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중요한 건 등뼈는 아무런 불만 없이 수십 년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처럼 나서기 좋아하고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해하기도 따라 하기도 참 힘든 일이다.
난 어릴 적부터 앞장서고 무대에 오르고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룹 발표 때도 티 안나는 준비보다는 그럴듯하게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것이 좋았고 밴드를 할 때도 반주보다는 보컬을 선호했다.
때로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의 재료들처럼 진정 내가 주인공이기에 나선적도 없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상황에서 난 감자탕의 감자처럼 주인공 아니면서 이름만 내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난 감자탕의 얼굴 역할을 맡은 감자의 염치없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감자탕은 '돼지등뼈탕'이 아닌 '감자탕'이란 이름을 가졌기에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등뼈는 맛있는 탕을 만들어 내기 위해 주된 역할은 하지만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누구보다 부끄러워하는 재료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양파도 마늘도 수제비도 모두 모두 이름 드러내기를 내키지 않고 있을 때 감자가 희생하여 이름이 되어준 것일지도 모를 일 이긴 하다.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돼지등뼈 가득한 맛난 탕은 분명히 '감자탕'이고 그것에 특별한 이의를 재기하는 이는 없어 보인다.
재료들끼리도 그렇고 먹는 우리도 그렇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감자 같은 사람도 있고 돼지등뼈 같은 사람도 있다. 물론 마늘이나 양파나 육수 같은 사람도 분명 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그 밖의 여러 모임에서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모여야 그룹이 완성된다.
감자 같은 사람만 있으면 서로 나서려고 다툴 것이고 등뼈 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이름조차 지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감자 같은 성향 가진 나는 주된 역할 하면서도 드러내지 못하는 등뼈 같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나의 존재도 의미 있음을 알고 있다.
감자탕이 오늘도 맛있는 것은 성격 다른 재료들이 각자의 역할에 불만 가지지 않고 묵묵히 함께하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가 제 각기 성향대로 살아가고 있는 건 다른 성향의 동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다름은 다르기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다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존재 의미도 사라질 수 있다.
승준탕을 위해 존재해준 수많은 등뼈님들께 감사하고 싶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