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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준 May 12. 2019

음료에게 이름을 붙여주세요

세상의 음료수 캔들은 국적과 제조사를 불문하고 다들 비슷하게 생겼다.


조금 더 길쭉하거나 상대적으로 뚱뚱한 몇몇의 특징을 가진 것들이 있긴 하지만 눈을 감은 상태에서 한데 모아놓은 그것들 중에서 각자가 먹고 싶은 음료를 정확히 고르라고 한다면 성공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먹고 싶은 음료를 골라서 먹는 것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겠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그것은 독립적으로 이뤄내기에 매우 큰 도전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 한 식혜 회사의 음료수 캔에 '음료'라는 두 글자가 처음으로 점자로 인쇄되었을 때 난 너무도 반갑고 기쁜 나머지 한 동안 그 음료만을 먹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미담이 알려지면서 다른 회사들의 제품에도 점자가 붙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시각장애인들에겐 또 다른 불편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음료수 캔들은 점자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점자는 모두 '음료'라는 똑같은 글자였다.


식혜 하나 정도는 구별해서 먹을 수 있던 작은 권리마저도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소주병에도 점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는데 그 반가움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제조사 관계없이 대부분 재활용이 되는 소주병의 특성상 다시 사용된 병의 글자는 현재 담겨있는 내용물과 관계없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이름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브랜드 스티커만 새로 붙이면 재활용에 아무 문제가 없는 일반 인쇄물과 다르게 유리에 새긴 점자를 다시 고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작업이었으므로 우리는 '진로'라고 적힌 처음처럼을 먹기도 하고 '선양'이라고 적힌 참이슬을 먹기도 했다.


그래도 요즘은 조금은 나아져서 '맥주' '탄산' '음료' 세 가지 정도의 점자가 캔의 종류를 대략이나마 구분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장애가 불편한 것은 크지 않은 차이들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음료수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비상약의 복용법을 읽지 못하는 것 지하철의 출구번호를 보지 못하는 것은 작은 불편함이지만 큰 차이를 만들고 그것을 장애라고 부르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기에 그 속에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은 소수의 약자로 구분된다.


'장애'가 없어지는 것은 의학의 발달으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시각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에게 다른 모양의 문자나 안내를 제공하고 턱을 넘지 못하는 휠체어 장애인들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접근성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닌 것이다.


일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의학의 발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장애를 없애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음료수 캔에 '음료'라는 점자가 붙어지고 그것이 다시 '음료'와 '탄산' 그리고 '맥주'로 나눠지는 과정은 아직은 미약하지만 큰 변화로 가는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많은 캔들에 똑같은 점자가 붙어있는 것은 내게 있어 너무도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엘리베이터나 지하철의 점자가 옳지 않게 붙어있는 것도 매우 기분 상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또한 일상을 공유하기 위한 누군가의 마음이고 노력이었다는 측면에서 오늘은 감사를 드리기로 한다.


음료수 캔에 처음으로 '음료'라는 점자를 붙인 누군가에게 그리고 그것이 다시 '탄산'이라는 조금 더 세부적인 이름이 되기까지 고생한 누군가에게도 소주가 담긴 유리병에 점자를 새겨준 어떤 이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시작한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에 조금의 생각들과 고민들이 더해져서 시각이 불편한 많은 사람들도 다수의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공유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어떤 음료가 처음으로 그것의 진짜 이름을 점자로 새기는 날! 그 날은 내게 있어 아주 큰 기념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난 한 동안 감격하는 마음으로 그 음료만 먹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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