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봉사활동 동아리에 강연자로 초대받았던 때의 일이다.
내 바로 앞 순서에 나온 그 단체의 회장님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에티켓들을 설명 중이셨다.
젊은 여성분인 그분은 시종일관 상냥함과 친절함을 유지하면서 매우 정확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딱 한 부분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은 앞을 볼 수 없어서 상대방의 외모를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상대에 대한 배려이니 처음 만나셨을 때나 서로에 대해 알아갈 때 얼굴이나 몸을 가볍게 만져보게 하시는 게 좋아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치 내가 모르는 여성을 시각장애인이라는 핑계로 더듬적거리고 있는 민망한 모습까지 상상되었다.
곧바로 이어진 내 강연 순서에 농담을 섞어서 잘못된 상황을 웃으면서 수습하긴 했지만 꽤 오랜 시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놀람의 장면이다.
서로서로 도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고 지나는 어르신의 짐을 들어주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이들에게 쌀이나 연탄을 나누는 일 모두 난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무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나눔을 실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나쁜 사람이나 틀린 행동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어느 나라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법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본인을 희생시키거나 스스로의 상식이 파괴되는 범위라면 더욱 그렇다.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에 대한 잇슈가 어느 때보다 예민한 요즘 시각장애인에게만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이 악물고 온 몸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이다.
팔꿈치 한쪽만 내어주면 시각장애인들에게 훌륭한 안내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것조차도 스킨십이라 부담이 되거나 힘든 일이라 여겨지는 사람이라면 굳이 도움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배움 혹은 여러 경험들을 통해 각자 사상의 스팩트럼을 만들고 행동의 경향성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한 취향이라는 것도 형성한다.
사회의 잇슈들로 인해 어떤 감수성들이 더 예민해지기도 하고 스팩트럼을 넓히기도 하지만 대상에 따라 그것을 예외적으로 확대시킬 필요까지는 없다.
한 친구가 장애인 이성을 소개받은 고민을 내게 이야기했다.
다른 모든 조건은 좋은데 장애인이라서 거절을 생각하는 본인을 자책하고 있었다.
난 아무런 죄책감 느끼지 말고 정중히 거절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누군가는 이성의 외모에 대해 분명한 취향을 가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재력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나 집안에 대한 뚜렷한 이성관을 가질 수 있다.
그 친구에게는 장애 없는 사람이 기본적인 조건이었을 뿐이다.
장애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나 인식이 그 선택의 올바른 판단을 방해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겠으나 외모나 재력 혹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그것들의 완벽한 본질을 이해한 후 스스로의 취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비록 장애라고 하는 객관적 약점이라고 할지라도 특별한 측은지심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
난 모든 인류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여성도 유색인종도 그 자체로 구분되거나 차별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 모든 이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가진 것을 주변과 나누고 서로를 돕는다는 건 나의 사고에서는 적어도 참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올바르지 못하다.
스스로의 모든 생각과 상황을 뛰어넘어 약자라는 이유로 항상 희생하고 도울 필요는 없다.
돕지 못하고 함께할 수 없다고 미안해할 필요는 더더욱이 없다.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함께할 수 있을 때 그때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