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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님 Jul 06. 2022

더 이상 서울에 살지 않는다

 지극히 사소한 나의 일상 #2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울에서 나를 낳고 길렀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쭉 서울에서 살았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 인천에서 잠깐 살았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대학교도 서울에서 졸업하고 취직도 서울에서 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쭉 서울에서 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서른 중반을 넘어 이직한 회사의 주소지가 하필 경기도였다. 나는 첫 출근을 하던 날의 공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월요일 아침에 서울의 끄트머리에서 한강을 가로질러 경기도까지 내려가야 했으니! 게다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버스와 전철을 세 번씩 갈아타며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서서 가느라 허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 집은 좀처럼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는 서울의 변두리에 있었다. 빈 손으로 시작하여 외벌이로 힘겹게 네 가족을 일궈내신 아버지가 가까스로 분양받은, 처음으로 장만한 우리 집이자 신축 아파트였다. 하지만 말이 좋아 서울이지 강남이나 종로 같은 중심가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게다가 아파트라고는 해도 고작 두 동이 동그마니 서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근처에는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어서, 급작스레 간장이라도 떨어진 날이면 어머니는 팔 차선 위의 육교를 가로질러 옆 동네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아파트를 사랑했다. 처음 이삿짐을 내리던 날, 모든 구석구석이 찬란하게 새 것인 신축 아파트에 나는 감동했다. 하다못해 가스레인지 위에 붙어있는 작은 라디오조차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부모님은 조금 무리하여 가구의 대부분을 새 것으로 들였다. 거실에는 우리 집 역사상 처음으로 소파가 놓였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집에 수리기사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별 뜻 없이 던졌을 법한 “집이 좋네요”라는 칭찬에 어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파트 옆에는 작은 천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어서 어머니와 나는 곧잘 저녁 산책을 했다. 봄이면 아직 덜 자란 벚나무가 비록 듬성듬성하나마 벚꽃을 피워냈다. 여름에는 들장미와 해바라기가,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그 작은 산책로를 따라 피어났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그 집을 사랑하며 이십 년이 넘게 살았다. 매물로 나온 집을 보려고 방문한 신혼부부는 오래된 집 치고 너무 깨끗하다며 바로 계약하고 싶어 했다. 그만큼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들의 첫 집이자 첫 아파트를 쓸고 또 닦아댔던 것이다.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는 역시 서울 변두리의 4층짜리 낡은 빌라에 세 들어 살았다. 국민학교(나 때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시절, 반 아이들은 그 빌라가 있던 동네에 사는 친구들을 가리켜 ‘xxx(동네 이름) 아이들’이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그 ‘xxx 아이들’이란 으레 생일잔치에 초대될 확률이 낮거나, 편을 갈라 피구 시합을 할 때 마지막까지 선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누가 xxx에 살고 누가 조금 더 좋은 동네에 사는지 구별하기란 쉬웠다. 어느 길목에 이르러 갈림길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아이들이 “xxx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 갈림길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다. 모두 같이 우르르 하교하다가 갈림길에 이르면 어느새 친한 친구들은 죄다 사라지고 나 혼자만 남는 꿈이다. 또는 생전 처음 보는 무표정한 아이들과 함께 그 길을 내려가는 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네의 낡은 빌라에 전세 들어 살던 나의 청소년기는 유독 반짝반짝하고 행복했던 순간들로 가득하다. 유난히 손이 크고 인정 많은 옆 집 아주머니가 김치전을 부치는 날이면 빌라에 사는 모든 집에서 구수한 김치전 냄새가 풍겨 나왔다. 위층의 명랑한 아주머니네에는 꼬맹이 둘이 있었는데, 나는 주말이면 자진하여 그 꼬맹이들의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놀았다.


어느 해인가의 유독 더웠던 여름날, 당연한 듯 에어컨이 없었던 빌라의 어머니들은 옥상에 함께 돗자리를 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방학 내내 우리는 다 같이 옥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느 날은 한 집에서 밥을 볶았고 어느 날은 다른 집에서 짜장면을 만들었다. 삼겹살을 구운 날이야 훨씬 더 많았다. 저녁을 다 먹고 나면 아이들은 돗자리 위에서 상을 펴고 공부를 했다. 어머니들은 과일을 깎으며, 남편에게 매를 맞다가 벌거벗은 채로 뛰쳐나온 앞 집 아주머니와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애가 없던 문방구 집의 착하디 착한 부부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코 끝으로 알싸한 모기향 냄새를 맡으며 돗자리 위에서 하는 공부는 제법 효과적이었고, 덕분에 나는 생일잔치에서 제외되거나 피구 시합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일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늘 김치전을 나눠주던 옆 집 아주머니의 아들이 학급 임원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갈림길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다.


경기도에 위치한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나는 결혼을 했고, 그와 동시에 난생처음 경기도에서 살게 되었다. 내 인생에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셈이다. 하지만 결혼하고도 처음 얼마간은 집과 동네에 정을 붙이지 못해 주말이면 자꾸 친정이 있는 서울로 도망갔다. 대형 마트와 전철역이 가깝고 출퇴근이 용이한 신혼집보다는, 황량한 도로변에 서 있고 부모님 손 때가 가득한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가 진짜 우리 집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은 이십 년이 넘게 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경기도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지금 나는 친정 부모님과 같은 아파트의 옆 동에 살며, 서울은 일 년에 채 몇 번도 가지 않는다.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의 산란이 서울과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척에 계신 친정 부모님 덕분일까. 아무튼 나는 이제 확실히 경기도에 살고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나의 고향 서울은 이제 지나간 옛 연인처럼 아리게 맺혀 있을 뿐이다.  


이직한 회사에서 회식을 하던 중이었다. 나와 여러모로 맞지 않는 상사는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자신의 자녀가 같은 초등학교를 배정받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맙소사, 그놈의 ‘xxx 아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모두의 얼굴을 골고루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상사의 표정에서 나는 갈림길의 위 쪽에 서있던 이십 년 전 반 아이의 표정을 보았다. 아마도 갈림길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아이를 생일파티에서 제외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피구 시합에서 같은 편에 넣어주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은 상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뻘쭘한 광경을 보고있자니 그만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놀랍게도 그 상사는 저 혼자 갈림길의 윗쪽에 살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는 끝나버린 생일파티 테이블에서, 모두가 하교해버린 운동장에서, 혼자 외롭게, 덩그러니. (2020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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