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불공정 사례 컬렉션
어떤 철학자는 '공원'이 시골을 잡아먹은 공룡의 배설물이라고 했다. 멸종되지 않는(을) 인간들이 진짜 숲의 나무들을 베어와 결코 숲이 되지 못할 인공 자연을 조립한 것이라고 말 한 작가도 있다. 반자본적 시각을 유려한 문체에 담은 그들의 사상은 매력적이고 경청의 흡입력이 있있고, 지금도 그런 비판적 시각에 공감한다. 반면, 요즘은 이 삭막한 도시에서 공원마저 없다면 도시인들은 더 빨리, 더 괴상하게 미쳤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또, 여행할 형편도 안 되고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조차 사치인 사람들에게 동네공원마저 없다면 그들은 쪽방에서, 단칸방에서 더 고독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실지로 돈, 시간, 친구가 넘치는 사람은 동네공원에서 노는 시간보다는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자가용을 몰고 딴 동네, 먼 나라로 여행 가는 일이 더 많지 싶다. 동네 밖을 어렵지 않게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동네공원을 가는 것은 조깅, (강아지) 산책, 시장 오가는 길, 어쩌다 피크닉에 할애하는 시간 정도일 것이다.
'가난한 노인은 혼자 살고, 부자 노인은 같이 산다.'라는 기사도 생각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고액 아파트, 실버타운 내의 좋은 공동 시설을 이용해 그런 시설들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친구들도 사귀고 만날 기회가 많다. 그러나 기초수급비 받아 생계만 겨우 유지하는 사람들은 친구를 사귈 돈이 없으니 혼자 지내는 거라고.
돈도 시간도 사람도 부족한 사람들이 그나마 손쉽게 혼자서도 갈 수 있는 집 밖의 공간이 공원일 것이다. 이들의 '시간'은 자기 방, 동네 밖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는 좀 다르다.
시간이 없다는 건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게 아니라, 뭔가를 희망할 시간이 없다는 거,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날도 없다는 거거든요. 자기 한 몸 부양할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는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날도 없다는 거거든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네공원>에 나오는 한 대화다. '출생증명서'와 '사망 신고서' 말고는 자신을 증명할 게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은 '희망할 시간이 없다'는 의미다.
처음엔 대화체의 에세이인가 했는데 소설이었다. 별다른 극적 사건, 해소가 없다. 자기가 속한 공간과 시간 말고는 다른 세상 밖은 꿈꾸기 힘든 남녀 둘의 대화다. 가방 하나에 가게를 담은 떠돌이 잡화상인 중년 남자와 상주 가사도우미 겸 간병사인 열아홉 살의 여자가 주인공이다.
1955년에 출간된 프랑스 작품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몇몇 단어만 뺀다면 당대의 한국 하층민들 얘기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우리보다 복지 선진국이며 카페 방문이 일상일 것 같은 프랑스에서조차 기차를 타는 사람, 공원 맞은편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그런 처지의 두 사람이 동네공원 벤치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하기는 힘든 사적이고 궁상맞은 속내를 나눈다.
가끔 저는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한테 말을 해요.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는 하기 힘들었던 얘기들을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겐 오히려 편하게 얘기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모르는 존재들끼리의 솔직한 얘기'를. 삶도 말도 고달파지면서 자주 보고 헤어지기 힘든 관계,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점점 입을 닫게 된다. 그런데 나를 잘 모르고 다시 안 볼 확률이 많은 인연과 공간 앞에서는 닫혔던 입과 마음이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들 각자가 공통성과 보편성이 뜻 없이 교차하는 공원에서 자신을 타인에게 불가능한 방식으로 내어주고 있는 뜻밖의 나눔의 시간…….
같은 책. 모리스 블랑쇼
블랑쇼는 뒤라스의 짧지만 깊은 여운이 남는 이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통찰의 해석을 한다. 뒤라스가 찾은 그런 근원적인 공유지가 '동네 공원'이며, 이 책은 그들처럼 '신분증' 없는 사회적 아웃사이더들에게 제 목소리를 내주는 거라고. 사회적 주류가 묵인하는 불의의 대가를 주변부의 삶들이 고통스럽게 치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불공정 사례 컬렉션"이라고 했다.
몇 달 전에 읽고 덮어놓은 이 책이 다시 생각난 것은 어떤 SNS에서 '고통은 극복된 이후의 시간만 보고 싶다, 고난 극복기는 극복된 그때부터 보고 싶다'라는 글을 봐서였다. 팔로우해서 보던 글 중 그 공간에서 꽤 오래 사라졌다 돌아온 분이 있었다. 가끔 메시지나 댓글로 오래 안 보인다, 무슨 일 있느냐는 다정한 걱정이나 안부를 들으며 그간의 심정을 털어놓은 글 속에 저 문장이 있었다. 다시 조금 더 쉬고 오겠다는 그 글엔 이런 고백이 이어진다.
-알고 보면 자랑 글인 이 공간의 글을 보면서 내 마음이 자꾸 불편해져서 문을 닫았었다. 나는 자랑할 게 없으니. 내 삶은 지리멸렬한 고난의 연속이거나 변하지 않는 투쟁의 연속이다. 즐겁지 않은 얘기들의 대동소이한 반복이다. 예쁜 카페나 고급스러운 식당, 전시장, 음악회에도 못 가고 풍경 좋은 곳을 시간 내 가기도 힘들고, 만나는 사람도 적다. 그림, 글, 사진, 바느질, 요리... 예술적 재능 한두 가지는 다 있어 그런 얘기할 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잘하는 게 없더라. 그저 내가 하는 일, 하는 생각, 심신의 병증, 하루치 밥벌이의 모멸감 말고는 얘기할 게 없다.
그런데 재주도 인기도 갈 곳도 만날 사람도 많은 그들은 같은 얘기하는 사람들 지겹다, 우울한 얘기 듣기 싫다는 얘기를 댓글로 포스팅으로 쓰더라. 내게 직접적으로 한 얘기든 특정 대상을 겨냥하지 않은 자기네끼리의 얘기든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고 못나지더라. 그래서 그들처럼 멋지고 즐거운 일, 새로운 일이 없어서 문을 닫았었다고.
나는 개방적 공간에서 애(哀)와 통(痛)의 비중이 과잉이 되지 않으려고 의식하며, 글쓴이의 상황보다는 조금 나은가 싶지만 저 말속의 소외감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SNS가 블랑쇼가 말 한 '공통성과 보편성이 뜻 없이 교차하는 온라인 공원' 같기도 하다. 결핍된 이들이 쉬고 말할 수 있는 무료의 평등한 공간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평범'에 많은 함의가 있고 평범하게 살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 공통성과 보편성, 평등이란 것도 더 사려 깊고 면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뒤라스의 소설 <동네공원>은 동네공원에서 처음 만난 하층계급의 두 사람이 반복되는 지루한 고통의 연재를 입으로 푸는 얘기다.
이 글이 뒤라스라는 세계적 명성의 작가가 아닌, 무명작가가 쓴 소설이거나 일반인이 SNS에 매일 올리는 우울 연재 일기였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이 책은 '극복된 고난'은 없고 푸념과 한탄을 일삼다 끝나기 때문이다.
가난과 간병 노동자의 사회, 공통체적 책임을 묻는 글도 아니고, 홈리스 인권을 주장하는 저명한 사회 운동가의 공분과 성찰을 담은 글도 아니다. 뭐 하나 눈길 끌거나 내세울 거 없는 사람들의 수미일관 넋두리다.
스무 살이 채 안 된 여자 주인공의 직업은 요즘 한국 사회의 직업으로 지칭하면 상주 간병사 겸 가사도우미다. 일반적 가사 노동이 끝나면 몸무게는 구십 킬로 넘고 나이 구십 다 된 거구의 치매 환자 대소변 침상 돌봄과 목욕 시키는 일이 기다린다. 그녀는 자기 같은 사람이 어떤 희망을 꿈꿀 수 있으려면 '이런 직업이 없어져야 가능하다'라고 통탄한다. 노동의 부당함에 대해 호소하고 싶어도 노동조합뿐 아니라 개인 누구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서 하지 않는다. (듣는 게) 너무 힘들어서.'라고 처음 본 남자에게 한탄한다.
우리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당하는 억울한 일에 공분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청원에도 동참한다. 복지사 출신의 간병사, 명망 있는 사회 운동가가 간병, 배달, 콜센터 활동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속의 얘기엔 연대의 공감을 표시한다.
그런데 정작 그 글 속의 당사자인 하층 무명씨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일의 괴로움을 반복하면 공감이 저항과 외면으로 바뀌기도 한다. 힘들고 지루해서 팔삭 했다, 지루하다, 나도 힘든데 저런 얘기 계속 듣는 거 힘들다라는 말은 점잖은 반응에 속하고 '배설'이라는 강한 어조도 본다. 너/네 가족 간병, 힘든 일, 가난은 너만 알고 비공개로 써라,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라... 는 감정적인 반응도 본다. 청원에 서명하고 '고마해라'가 같은 사람일 경우도 있지 않을까? 고통을 재시청하는 게 힘들면 조용히 발길 끊는 것만으로 충분할 텐데.... 고통의 발설을 막는 공감과 연대의 다면성을 생각해 본다.
최근에 읽은 심리 치료 글 중 '이야기 치료의 개념'을 설명한 부분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이야기적 존재로 태어나며, 자기 이야기의 주체이며, 한 사람의 이야기는 주제가 있는 우리 삶의 역사적 기록이다. 언어활동을 통해 잃어버린 자기의 언어 또는 참된 본성을 찾아가도록 돕는 과정이다. 문제가 되는 이야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 혹은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문제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뒤라스는 '특정한 불공정 사례 컬렉션'으로 자기 이야기가 막힌 사람들에게 그들 삶의 주체성을 주고 싶어 한 거 아닐까. 불편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살 만한 사람들이 잘못 믿거나 외면한 믿음에 대한 사회적 질문을 소설로 기록한 일.
<동네공원>의 해설 속 모리스 블랑쇼의 말을 다시 찾아본다. 작품 속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떤 '궁극의 이해나 위로'라기보다는 '말하기'라는. 그는 하층 계급이 이해와 위로를 받는 것은 너무 먼 목표이니, 그들에게 '유예된 마지막 방편'인 대화를 잠시나마 이용할 뿐이다. 그들은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이유에서 그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라고 한다.
생존 상의 결핍은 정서, 대화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모든 '결핍에 익숙해지는' 사람들. 그들이 생각하는 '미래적 고민'과 '위로'란 불과 이런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살아남는 것, 곧 굶어 죽지 않는 것과 매일 저녁 지붕 있는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자기 한 몸 부양하는 거 말고 다른 걸 생각할 수 있으려면 일단 그 문제가 해결되어 그 생각을 안 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한 끼 먹자마자 다음 끼니를 생각하게 된다면, 미치지 않을까 싶어요.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날도 없다는 거거든요.
-그래도 우리는 먹고는 살아요. 우리가 여기까지는 해낸 거예요
자기 방어적 결핍이 일상인 그들은 희망이 어색하다. 수많은 아파트 불빛 속에서 내 집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같이.
(원하면서 동시에 원하지 않는)…. 세부적인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 원하는 무언가를 이미 가진 상태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법 같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은 아닌 것 같아서....'
그(둘)은 대화의 결핍을 일시적으로 해소하지만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실질적 '경험'에까진 이르진 못한다. 미래에 대한 동기화가 이루어지지 못해서다. 정보라의 소설 속 한 장면에서 어떤 '희망' 혹은 '소원' 앞에서 경직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어색해질 거야
무엇을 빌어야 할까
나쁜 시간을 아니면 좋은 시간을
정보라 <재회>
뒤라스는 이 소설에서 '스무 살'을 이렇게 표현한다.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가슴 아팠던 말이다.
스무 살은 아직, 세상에 폐를 끼칠 시간이 없었던 나이예요
소설 속, 소설 밖 스무 살과 그런 스무 살을 지나온 수많은 결핍의 무명씨들에게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이 당도하길 기원해 본다. 또, 그들의 쓸쓸한 자조대로 '즐기는 법, 맘' 하나씩은 품을 수 있기를.
즐기는 법을 배워야지요…. 새로운 것들을 보는 법 같은 건, 맞아요. 배워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