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는 사람 Jan 16. 2019

홍상수 영화 속 나쓰메 소세키

직업은 있는데 일 안하는  남자들

  홍상수 영화들을 꽤 많이 봤다. (14편!)

<그 후>와 <밤의 해변으로 혼자> 이후  작품들은 이제 관람 욕구가 시들해져서 안 봤다. 그의 전작을, 영화관에서 다 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홍상수 마니아나 영화 관계자가 아닌 평범한 관객으론 적은 숫자도 아니다. 내가 한 감독의 영화를 '14'편을 볼 정도로 홍상수 영화를 좋아했었나? 했던가?를 곰곰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14편의 반에도 못 미치는 편수를 본 다른 감독들을 더 좋아한다.     

  그렇게 많은 홍상수의 영화를 본 것은 그의 영화가 혼자, 집에서 키득거리며 보기 좋다는 이유가 크다. 홍상수의 개인사가 시끄러워지기 전에도 내 주변에는 그의 영화를 보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프랑스 영화처럼 재미없다, 재미없는 흑백 독립 영화 같다, 영화가 영화답지 않고 너무 현실적이다-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거의 혼자 봤다. 나이 들면서 답답하고 시끄러운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게 귀찮아진 데다 홍상수 영화는 극장에서 보나, 침대나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서 보나, 공간이 감상에 미치는 영향이 적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형 멀티플렉스 관에서 떠들썩하게 보는 게 잘 안 어울리는 감마저 있다.

  

  중년 부인들이 아침 설거지도 미룬 채 거실과 찜질방에 모여 앉아 '욕하고 화내면서' 계속 보는 게 아침 막장 드라마라지? 홍상수 영화도 욕하면서 계속 보게 된다. 아버지뻘 교수와 딸 또래의 제자, 기혼의 중년 감독과 젊은 미혼 배우, 업계 선후배 사이의 불륜과 양다리, 삼각관계 등 소재만 보면 막장이다. 그러나 홍상수가 영화 속에서 피력한 자부심 있는 말처럼 같은 소재라도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하긴 하다.  사람들은 홍상수 개인사가 더 영화 같다거나 안 봐도 다 아는 뻔한 내용이라 했고, 홍상수의 영화보다 그의 가정사를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실지 불륜자들이 불륜 영화로 세상에 항변한다고, 영화를 보지도 않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처맞아라'라는 식으로 그들의 가족으로 빙의한 듯한 비난에는 실소한다. 내 남편, 우리 아버지, 내 딸 같은 감정이입은 이해되나 그래 봤자 얼굴 한 번 못 본 생판 남인 그들이 헤어지든, 벌을 받던 뭔 상관인가? 성폭행하고 발 뺌한 감독, 작가보다 솔직해 보인다.

  이렇게 고상하게 말하지만 홍상수 영화들, 정확하게는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의 행태와 대사를 짜증과 실소 속에서 자주 봤다. 반복되는 소재와 자기 복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치열함이나 작은 믿음 하나 없이 자기 연민과 변명으로 일관하며 허무와 냉소로 말 잔치 놀음을 하는 방구석 철학자들. 온갖 현학을 떠들어대도 속내는 결국 모두의 로망인 주인공 여자와 한 번 '자보는' 것에 불과한 지질한 남자들이 홍상수 남자들의 공통된 캐릭터다.    


  내가 봤던 거의 모든 홍상수 영화에 나온 문성근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영화 속 인물들에 투영되는 홍상수의 철학, 영화 밖 사담에서의 세계관 등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지만 예민한 감수성과 다른 세계관을 지닌 예술가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 ”    

 

 문성근처럼 행복감까진 못 느껴도 홍상수 영화에 대한 내 감정이 저랬다. 그의 영화에는 공감할 수 있으나 그가 삶을 대하는 방식에는 반대한다면 모순적이라고 하겠지만 홍상수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랬다.


  영화를 영상 이미지라는 원래 용도보다는 문자, 텍스트라는 문학적 용도로 감상하고 이해하는 내 취향에 맞는 감독이 이창동, 홍상수다. 이창동이 문학적인 양식으로 인간, 한국의 시대와 사회를 묻는다면 홍상수는 영화적 기법에 충실하면서 프랑스 철학을 빌린 영화가 주를 이뤘다. 이창동이 자기가 모르거나 겪지 못한 세계와 대상에 대해서도 ‘고민’ 할 때, 홍상수는 자기가 아는 사람과 세계에 대해서만 ‘떠든다.’    

영화 <북촌방향>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감독, 교수, 작가 등 고학력 전문직이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직업은 있으나 노동 없는’ 족속들이다. 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자들은 '노동'이 없는가? 그럴듯한 직업은 있는데 일하는 모습은 없고 늘 술집을 번갈아 드나들며 수다 속을 유영하지만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인간들은 하나도 없다. 자기 일을 안 하니 진짜 자기 얘기도 없고 그저 어디선가 읽고 들은 남의 철학과 예술만 주야장천 떠들어 댄다. 후줄근한 행색의 그들은 왜 '먹고사는' 고민이 전혀 없는가? 작가, 감독, 평론가들로 나오는 그들은 왜 작품에 대한 얘기나 고민이 없는가? 글을 안 쓰고 영화를 안 만드는 감독/작가들의 생활비, 술값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책은 안 만들고 불륜에만 여념 없는 사장이 운영하는 출판사는 작가 인세, 인쇄소 대금, 직원들 월급 고민 일절 없고 독촉장 한 번 없이 잘 굴러간다. 일하지 않고 입으로만 고민하는 그들은 생활의 치사함 대신 치사한 행태를 전시한다.     

영화 <그 후>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주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그 후>는 나쓰메 소세키 소설과 동명 제목으로 영화에서 봉완이 아름에게 건네주는 책이다. 영화를 본 뒤의 어느 기사에 따르면 원래는 <마음>을 먼저 생각했는데 영화 배경이었던 출판사에 그 책이 없어서 <그 후>로 하게 됐다고 한다. 나는 마침 이전에 그 두 책을 다 읽은 참이라 두 책을 뒤져 옛날 밑줄을 찾아보았다.

<마음>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빈 잔을 가지고 끝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처럼 말씨름이나 하는 그들은 직업은 있는데 노동은 없다.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을 묘사한 말이지 뭔가! <그 후> 속에는 이런 글도 나온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일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지.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이야. 생활을 위한 노동은 노동을 위한 노동이 아니니까. 요컨대 먹고살기 위한 직업에는 성실하게 매달리기가 어렵다는 의미지.
먹고살기 위해서니까 맹렬히 일할 생각이 일지 않을까? 맹렬히 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실하게 일하기는 힘들지.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고 하면 결국 먹고사는 것과 일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나?물론 먹고사는 쪽이지.
그것 봐.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방편이라면, 먹고살기 쉽게 일하는 방법을 맞추어갈 것일 뻔하지 않겠나?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 개의치 않고 그저 빵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노동의 내용이나 방향 내지는 순서가 다른 것의 간섭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노동은 타락한 노동이라 할 수 있지.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고 하면."


나는 책 속 저 대사 때문에 ’ 성실’과 ’맹렬’을 사전에서 새로 찾아보았다.

성실: 정성스럽고 참되다. 맹렬하다: 기세가 몹시 사납고 세차다    

  

홍상수 영화에는 왜 ’ 노동 없는 인간들이 즐비한가? ‘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빵(생존)' 우선순위인 노동은 '정성스럽고 참된' 마음이 아닌, 그저 먹고살기 위한 사납고 세찬 기운으로 노동의 주객이 바뀐 타락한 노동이란 것이다. 처음 들으면 내 노동의 이유 90%쯤은 생존이라 매우 화가 나는데 두 번 이상 읽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맹렬함 없이는 그런 노동도 인내하기 힘들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또 '노동의 신성함'이란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고 채찍질한 물질 숭배를 도덕과 윤리로 포장한 건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든다.  

  

홍상수나 소세키는 자아를 잃고 인간 영혼의 자유 의지를 말살시키는 맹목적 노동 신성화에 딴지를 걸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외에도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나 '결말' 없는 결말은 홍상수 영화와 상통하는 지점이 많다.  예전에는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이 역시 지식인 룸펜에 속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이상의 <날개> 속 인물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많은 작품에서 '먹고사는' 것의 고통을 심각하고 처절하게 표현했다. '술'은커녕 '밥' 먹을 돈도 없는 극빈의 처지를 절절히 토로했다는 것에서 그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 역시 세속의 고민과는 거리가 먼 방구석 철학, 자기 과잉과 연민에 빠진 인물들이었지만 주인공의 시선과 말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을 심도 있게 표현했다. 또, <날개>의 주인공은 대인관계없이 주로 방구석을 지키는 나 홀로 몽상가라는 점에서 집에는 거의 없고 늘 밖으로 떠도는 홍상수의 남자들과는 또 다르다. 나쓰메 소세키의 고급 룸펜 주인공들도 주로 '집 안'에 자폐 돼 있다.    


  홍상수 영화 속 술자리 만담도 나쓰메 소세키 소설 속 인물들의 대사, 분위기와 아주 흡사하다. 소세키의 소설 역시 삶과 사상이 불일치한 노동 없는 주인공들이 내실 없는 고담준론이나 펼치고 앉아 있는 장면이 많다. 소세키나 홍상수 속 남자들은 다양한 지식과 생각, 나름의 철학도 있지만, 그 지식과 생각은 '밖'으로는 결코 안 나온다. 그들의 생각은 늘, '방 안의 머리’와 '술집의 취한 혀‘에만 있어 방 밖의 몸으로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술과 철학은 비겁하고 안전한 '안'일 뿐이다.

영화 <옥희의 영화>


공부가 가장 깨끗해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책이나 읽읍시다. 세상이 이렇게 썩어 버리면 우린 책으로 들어가야 해요. 책뿐이 없어요."(옥희의 영화)   


  

세상이 었으니 책 밖으로 나와 썩은 세상과 만나 싸우자는 게 아니고, 믿을 건 책밖에 없으니 그저 책 속으로나 회피하자는 이런 말들이 익숙한 홍상수식 냉소다. 책은 그의 여러 영화 곳곳에서 소품과 배우들의 대사 자주 등장하는데, 홍상수가 사람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주요 통로가 책이라는 걸 짐작게 한다.   

  소세키나 홍상수의 남자들은 자기 방 안에서 '창'도 아닌 혼자 '거울'만 보고 있는 인물들이다. 거울은 그 '안'도 '밖'도 없으며 오로지 내가 비추는 것만 한정적 공간을 담을 뿐이다. 볼 수 있는 것, 말하는 것, 답하는 것도 거울에 비치는 제한적인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 자문자답 나르시시즘에 빠진 꼴이다. 거울을 깨고 밖으로 나가서, 자기와 다른 부류들이 속한 세상도 봐야 말의 설득이 아니라 삶의 설득을 발견할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결말 부분에 다이스케는 그 거울을 깨고 거리로, 사람들에게로 나간다. 나가서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마음>도 그렇고 <그 후>도 그렇고 결말은 '미완성'작이다. 안전한 집을 떠나 불안한 밖으로 진정한 나를 찾으러 가는 것이 두 글의 공통적 결말이다. 가출 후 그들의 불안한 미래는 독자의 상상력, 혹은 책 속의 주인공들한테 맡기고 자기 자신을 깨고 (집)을 나가는 것이 글의 '끝'이면서, 주인공들의 새로운 '시작'이다.   


  열심히 사는 걸 경멸하며 게으름의 변명, 세상에 믿을 건 없다는 불신과 책임 회피성 허무론이나 늘어놓는 홍상수 영화 철학, 세계관을 복기되는 문장들이 소세키의 소설들 속엔 그득하다.

  홍상수 영화 속 여자들은 자립적이고 똑똑하며 솔직한 인간으로 점점 진화하는데 남자들은 어째 더 퇴보 한다. 그 어느 것도, 누구도, 나 자신과 기억조차도 믿을 게 못된다며 '기억의 반복과 어긋난 기억'이나 일삼던 홍상수는 믿음과 관계에 대한 자신의 회의를 소세키의 <마음> 한 구절에서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얹게 만드는 법이네.
 




나는 저 문장을 빌려 '가에서 하까지' 나오는 첫 글자로 짧은 글짓기를 만든 적이 있었다.   


 <마음>

가/을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한번 읽어봐.

다/들 주장하는 자신의 정당성을 비웃게 될 거야.

라/쇼몽 처마 아래서 읽으면 더 좋겠군.

마/음이 얼마나

바/뀌기 쉬운 줄 부끄럽게 깨닫게 될 거야.

사/실 진심이란 건 주장할수록 그 정체를 더 모르겠더군.

아/까 바로 *니 앞에서 무릎 꿇던 그 발을 네 머리 위에 올려놓게 되는 거*,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 있는 게 진심이란 거지.

차/마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테지.

카/드 점괘보다 믿을 게 못 되는 게 마음이야.

타/인에게 쏟아놓는 무수한 그 진심들이

파/도 속 거품처럼 곧 사라질 것을

하/마터면 깜박할뻔했다.


*친 문장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함.




이전 08화 <동사서독>과 <집중과 영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