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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May 30. 2020

인생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걷기왕>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은 어떡하지요     

도로에서 가장 느리게 달리는 차는 나다. 오늘도 나는 가장 느리게 달린다. (…) 학교 다닐 때 내가 가졌던 의문도 학교라는 곳은 왜 꿈과 재능이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곳일까 하는 점이었다. 꿈도 재능도 없는 평범한 아이들도 살아갈 방편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보통의 존재』라는 책 속의 한 문장이다. 읽은 지 오래돼 세세한 내용은 가물거리지만 ‘느림과 꿈’에 대한 내용은 선명히 기억한다. ‘세상에는 특별한 꿈 없이 사는 사람도 많다. 모두가 트로피를 거머쥔 대표 선수, 레드카펫 밟는 감독, 천재적 연주자를 꿈꾸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무대에 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관객도 있어야 한다. 왜 모든 사람이 다 거창한 꿈이 있다고 단정 지을까? 실제로는 꿈 없는 학생이 더 많다. 학교는 꿈 없는 아이들도 살아갈 방편을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 같은 질문으로 기억한다.

 

<걷기왕>. 백승화. 2016


영화 <걷기왕>을 보면서 『보통의 존재』에 나왔던 ‘꿈과 속도’에 관한 글귀가 생각났다. 많은 사람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게 있다.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한 가지 꿈은 다 가지고 있다” 영화 속 담임선생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중요한 건 꿈을 가진 열정과 간절함”이고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강화도 소녀 만복은 별 꿈이 없다. 선천적 멀미 증후군으로 자동차는 물론 소도 못 탄다. 매일 왕복 4시간을 걸어서 등하교한다. 새벽에 나와도 늘 지각이고 아침저녁 2시간씩 걷느라 피곤해서 수업 시간이면 곯아떨어진다.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피곤하다.” 일상은 피곤하고 걷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지만 큰 불만 없이 낙천적으로 살아간다. 그런 평화로운 만복에게 어느 날 경보慶補가 울린다. 열정적인 담임은 가장 좋아하는 책도 『꿈과 열정, 가난을 이긴 성공의 비밀』인데 만복에게도 역시 꿈과 열정을 주문한다. “넌 잘 걸으니 경보 선수가 되면 잘할 거야”라는 담임선생의 칭찬에 고무된 만복은 처음으로 꿈과 열정을 가져 보기로 한다. 꿈 없이 살던 만복에게 많은 일이 일어난다.


   경보 이야기가 주축인 이 영화의 제목은 왜 ‘경보왕’이 아니고 ‘걷기왕’일까? 경보의 한자어에는 스포츠 종목인 걷기를 겨루는 ‘경보競步’ 말고 ‘경보頃步’도 있다. ‘한 걸음의 절반인 반걸음’이라는 뜻과, ‘갈아 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한자 경보頃步를 보며 이런 말이 읽혔다. 남이 한 걸음 빨리 걸어도 나는 조금 느리게 반걸음 걸어도 괜찮아. 내 밭은 내 속도대로 갈고 소는 제 속도대로 밭고랑을 일궈야지. 내가 옆집 밭과 경쟁하고 소를 경운기처럼 다그치다가는 밭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나도 소도 엎어질 것이다. 각자의 속도대로 제 깜냥껏 할 수 있는 만큼 할 때 사람에게도 소에게도 밭에도 좋다.

   영화에서 ‘경보는 뛰고 싶은 것을 참는 게 가장 힘든 것’이라고 한다. 만복은 뛰고 싶은 생각이 애초부터 없던 아이다. 만복이 잘하는 것도 ‘걷기’지 ‘경보競步’가 아니다. 걷기는 자신한테 편한 속도로 걷는 ‘자족’이면서 내 옆에서 같이 걷는 이의 속도를 맞추는 ‘배려’의 행위다. 반면 경보는 ‘남의 속도’를 ‘쫓아가서 앞서야’하는 ‘경쟁’이다. 만복은 그동안 누가 내 앞에 가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내 뒤에 누가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보를 하면서 불안해졌다. 이제 남보다 몇 보라도 앞서야 편하고 누가 뒤에 있으면 불안하다. 경보競步를 하면서 만복의 인생에 경보慶補가 켜졌다.

 

   걷는 건 누구나 하지만 경보는 아무나 안 한다. 경보는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특별한 날에 하지만 걷기는 별 목표가 없는 일상의 평범한 행위다. 영화는 내가 나로 만족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한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 꿈은 미리 정해놓아야 하는 목표나 정답이 아니라 살면서 생기고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설혹 거창한 꿈 없이도 저 나름의 삶을 꾸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자기만의 길과 속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걷기왕>은 ‘맹목의 열심’과 ‘박수받는 꿈’을 강요하는 어른들을 힐난한다. 각자의 능력과 환경,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꿈과 노력의 강요가 무책임하다고 보여준다. 영화 속 담임선생은 자신의 열정에만 사로잡혀 학생들에게 습관적으로 꿈을 주문한다. 차멀미가 심해서 걷는 학생에겐 경보를 강권하고 단지 피리를 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피리 연주가가 되라는 꿈을 불어넣는다. 늦게 출발해서 일찍 출발한 사람들과 같이 가는 게 너무 힘든 만복에게 ‘꿈과 열정을 향한 간절함’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다그친다.

“만복아, 노력엔 끝이 없단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개울가 이무기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개천에서 용이 된 영웅이 주로 나왔던 MBC 프로그램 <인간시대>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방송은 극빈한 청소년들의 ‘꿈 전시장’이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단칸방 수재나 전래 동화 속 주인공 같은 효자와 소녀가장들만 나왔다. 공부가 가장 쉽지도 않았고 소녀가장과 비슷한 환경이지만 불효자였던 나는 두 콘셉트 다 불편했다. 가난한 싱글맘의 죄책감을 고진감래의 보상으로 대리만족시켜주던 그 방송을 엄마는 좋아했다. 방송 시간은 하필 저녁밥 먹는 시간이라 나는 그 방송이 나오는 날은 밥맛 잃었지만, 엄마는 고난의 진수성찬 뒤의 성공신화에 눈물로 세수를 하며 나를 채근했다. “재들 좀 봐라.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 살면서도 전국 수석 하잖아. 우린 셋밖에 없잖아? 공부가 젤 쉽다잖니!”

   <인간시대>와 비슷한 이유로 채널A에서 방영하는 <서민갑부>도 싫어한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죽을 만큼 일하고 극한의 절약으로 갑부가 됐다. 인간시대는 인간과 시대 사이에 ‘승리’의 과몰입을 은폐시킨 것이고 서민갑부의 방점은 서민이 아닌 ‘갑부’다. ‘개천 용’ 신화를 다룬 이야기 대부분은 ‘실패하지 않은 꿈’ ‘성공한 노오력’만 부각했다.


   ‘개천의 용’이란 결국 ‘승천한 용’이 돼야 대접받는 세상임을 인정하는 반어다. 좋은 세상이란 내남없이 개천 밖으로 다 몰아 개천 위가 미어터지고 박 터지게 하는 게 아니라 개천 이무기로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다. 홈그라운드인 개천에서 등 떠밀리지 않는 것이다. 승천한 용들로 인한 박탈감, 소외감이 들지 않게 하는 곳이고 이무기들에게 용이 되라고 채근하지 않는 곳이다. 트로피, 전국 수석 같은 ‘날개’ 없어도 날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고 날지 않고 더디게 걸어가도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힘들다, 아프다는 말을 못 하게 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    

 

영화 <걷기왕>은 각자 다른 타인의 삶의 형태와 속도를 긍정하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한다.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다는 현실을 포장하지 말고, 안돼서 멈추거나 돌아가는 것을 무능, 실패, 죄로 치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담임선생은 장래 꿈이 ‘공무원’이라는 만복의 짝꿍 지원에게 더 원대한 꿈을 꾸라는 훈시를 한다. ‘더 참고 너의 한계를 이겨내라’는 선생에게 지원은 소리친다. “공무원은 쉬운 줄 아세요? 뭘 자꾸 이겨내야 해요? 힘들어 죽겠는데! 왜 참아야 해요!”


   힘든 것, 아픈 걸 숨겨야 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강한 사람만 인정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아픈 사회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집단 발병지로 지목된 콜센터, 정신병원 등도 ‘아픈 걸 숨겨야 하는’ 곳이었다. 재택근무, 재난 유급휴가가 인정 안 되고 연월차 쓰기 힘들고 장기 병가는 생계 불안과 퇴직으로 이어지는 곳. 아픈 사람들이 단체로 수용된 병원은 우리 동네에 오면 안 되는 곳. 땅값 떨어지게 하는 곳. “나 힘들어요, 많이 아파요”라는 말이 “그만두세요”로, 아픈 사람은 건강한 우리 동네에 “오지 마세요”가 되는 곳. 뒤처지지 않으려면 “죽을힘을 다해 참아”라고 어른들이 아이들을 등 떠밀 때 감독은 만복의 시행착오를 통해 “죽을힘을 다하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라는 경보를 울린다. “너무 힘들면, 죽을 것 같으면 거기서 멈춰도 돼. 나를 너무 닦달하고 혼내지 말고 쉬어도 돼. 그게 결승전 한 바퀴를 남겨 둔 지점이래도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만이야.”라는 위로를 얻는다.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


이 영화가 무조건 ‘아무것도 안 함(만)을’ 권장하고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담임의 권유로 공부는 못 하겠고 운동은 쉬워 보여 별 목표의식 없이 경보를 시작했던 만복이 발톱이 썩을 때까지 열심히 달린다. 포기하고 비난받는 게 무서워 아파도 아프다고 말 안 한다. 이제 이거라도 안 하면 무섭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와 꿈도 좌절해 봤을 때 더 선명해지는 것처럼 만복도 넘어진 다음에야 경보가 제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주위의 강권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꿈을 정해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고 극복하려는 주희도 있고 공무원이란 현실적 꿈을 정하고 노력하는 지원도 있다.이들은 꿈의 유무와 승패, 타인의 평가와 시선보다 각자 ‘자기만의 길과 속도’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동차 멀미 증후군으로 하루 4시간을 걸어 등하교하는 만복의 캐릭터는 ‘나무늘보’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늘보는 한 시간에 900m를 겨우 이동하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로 꼽힌다. 900m는 버스 정거장 한 구간 정도 거리고 보통 성인 걸음으로 10분 안에 도착하는 거리다. 만복을 부를 때 “만보기”로도 들리는데 하루 만 보 이상 걷는 주인공에게 딱 맞는 이름이다.

   만복의 경보 코치가 만복 담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담임의 애독서 한 부분을 인용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속에선 학생보다는 연애에 몸 단 선생이 영혼 없이 읊는 것으로 코믹하게 표현되지만 이 영화의 주제가 담겨있다.     


인생은 육상이 아니다. 육상은 정해진 코스 위를 달리는 거지만 인생은 자기만의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다. 저 거친 광야를 헤매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닫힌 길 안으로 밀어 넣어 ‘끝없는’ 노력을 채찍질하는 것보다 열린 길 밖으로 자유롭게 한 보 한 보 내딛게 하는 게 오히려 꿈을 찾아주는 일 아닐까? 정해놓은 답이 아니라 질문과 불안을 찾아가는 것. 꿈은 절대 불변의 고속 직진, 속도전이 아니라 바꾸고 돌아갈 수도 있는 오래달리기 완행 코스라는 것. 좋은 어른은 지금 당장의 꿈을 정해주는 것보다 다가오는 꿈을 막지 않는 것이다.

   만복은 여전히 차를 타면 토하고 경보 유망주였던 선배는 발목을 다쳐 더 이상 운동을 못 하지만 자책도 원망도 없다. 발톱이 빠지고 발목을 다친 그 둘이, 뛰다가 넘어지고 다친 그 둘이 오늘도 다시 걷는다. ‘아직 알 수 없는 내일과 미래를’ 향해 ‘같이’ 걷는다.





이 글은 교육지 민들의 의뢰를 받아 2019년에 발간된 졸저 <내 맘대로 살아볼 용기. 들메나무> 실었던 영화 얘기 <걷기왕>을 수정, 가필하여 민들레 5,6월 호에 실은 것입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사람이 써도 시간이 지나서 보면 부끄러움이 많고 코로나 등 그때와는 다른 여러 상황들이 감상에도 새로운 영향을 끼칩니다. 그 부끄러움과 새로 얹어진 단상, 달라진 글 속 인용문을 이번 글에 얹었습니다. 들메나무와 민들레의 허락을 받아 브런치에도 올립니다.

http://aladin.kr/p/gNb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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