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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Aug 19. 2020

숫자를 넘어, 차별을 넘어

Hidden Figures(히든 피겨스)



누가 꿈꾸는가. 몸이나 처지나 조건이 온전하지 않은 자가 아니라면 누가 구태여 꿈을 통해 살기를 희망하겠는가?.... 그는 꿈을 통해 하나의 인격,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비루하기 때문에 꿈꾸지만, 꿈꾸기 때문에 그는 고상하다. 삶의 열악함이 그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가 꾸는 꿈을 통해 위대해진다.
이승우 <소설을 살다>


언젠가 SNS 친구가 인용(이신정)한 글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인데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고 나니 저 문장이 생각났다. ‘처지나 조건이 온전하지 않은 자’들이 꿈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가 꾸는 꿈을 통해 스스로 위대해진 여성들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숨은 숫자, 숨은 영웅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감독 시어도어 멜피


당신(들)한테 악감정은 없었어요.  


소련의 선도적인 우주 개발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이 육해공군과 우주 연구소를 통합해 만든 1960년대의 미 항공 우주국 NASA는 인종, 성차별이 심다. 성비, 인종 비율의 단순한 수치적 불균형은 물론 중요한 프로젝터, 승진 시 여성과 흑인은 배제다. 미첼은 나사에서 컴퓨터 계산원인 여직원들의 계약, 해지 인사권을 쥔 주임이다. 그녀는 차별받으면서 차별하는 양가적 인물이다. 남자들 정글에서 “로켓에는 빨라도 승진에는 느리다”라는 자조를 하면서도 흑인 여성 직원 앞에선 백인 상사로서의 우월성을 쉽게 드러낸다. 영화 주인공 중 한 명인 도로시가 드디어 흑인 여성 최초로 나사의 정규직 관리직이 된 후 미첼은 그간의 자기 행동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말한다.

(미첼) “당신은 특출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한테 악감정은 없었어요.”

(도로시) “알아요. 본인은 그렇다고 생각했겠죠.”    

 

저 대화를 보며 최근에 발생한 의정부고 졸업생들의 ‘관짝 소년단’ 코스프레와 샘 오취리의 항의 후 도로 사과 사건이 생각났다. 매년 기발한 졸업 이벤트로 유명한 의정부고 학생들이 올해는 흑인 분장을 하고 그들의 장례 문화를 패러디했다. 한국에서 예능인으로 활동하는 가나 출신인 샘 오취리는 흑인을 비하한 희화화라며 불쾌감을 표시했고 이를 지지하는 측과 반박하는 측의 대립이 현재까지도 첨예하다. 의정부고 졸업생들도 악감정은 아니었다는 뜻의 해명을 했다. 그런데 모욕(감)이란 어떤 쇼의 행위자보다는 대상화인 수용자의 감정이 더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 관짝 소년단 이벤트를 옹호하는 쪽에선 흑인을 흑인으로 분장한 게 비하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치면 누가 어떤 단순한 즐거움을 목적으로 장애인, 동성애자, 여성, 가난한 사람의 특정한 면만 부각한 모든 표현이 ‘악감정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 모욕을 느끼는 대상자 대부분은 소수자, 약자이거나 약소국임을 상기해보자. 강자가 모욕을 느낄 일은 별로 없다.



민스트럴 쇼와 짐 크로법

토마스 다트머스 라이스가 부른 ‘점프 짐 크로’


1960년대에 미국의 인기 코미디 뮤지컬 중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백인 배우가 짐 크로(까마귀:가난과 어리석음의 대명사)라는 이름 흑인으로 분장해 흑인 비하 연기를 많이 했다. 이 쇼는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 속에서 인종 차별 행위의 가장 대표 사례로 꼽혔다. 극 중 배역인 짐 크로의 이름을 붙여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인종 차별법이 ‘짐 크로법’이다. 이 법은 미국에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90년 가까이 유지됐다. 버스,  식당, 호텔 같은 상업 시설은 물론 도서관, 법원 같은 가장 평등해야 할 공공 기관에서조차  흑인과 백인 사용 장소를 분리 지정했다.

샘 오취리가 학생들이 흑인 장례 문화를 패러디하면서 검은 피부 분장을 한 것에 인종 차별적 모욕감을 느낀 것은 그런 오랜 역사적 배경도 있을 것이다. 굳이 미국의 60년대 역사까지 끌어올 것 없이 백인들이 동양인을 표현하며 눈 째는 행위, 일본인들의 작은 언행 하나에도 민감히 반응하는 한국인들의 심정을 되새겨보면 금방 이해할 일이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배경은 짐 크로 법이 폐지되기 불과 몇 년 전으로 미국 최초의 유인 발사 우주선 계획에 참여한, 최초의 흑인 여성 3인의 실화를 각색한 영화다.

나는 이 짐 크로법을 아래의 책 <그렇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를 통해 처음 알았다.

미국의 정치 운동가이자 전미 유색인종 협회장인 메리 처칠 터렐이 1906년도에 이런 연설을 한 지 60여 년이 넘을 동안 짐 크로법은 유지됐다. <그렇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 76쪽

지은이 에나 러셀/카밀라 핀 헤이로. 옮긴이 조이스 박. 키스톤


   

히든 피겨스 1-캐서린 존슨

타라지 P. 핸슨(캐서린 존슨). 무인 우주선 프랜드쉽7 팀. 인종, 성차별을 보여주는 직원 구성비.


캐서린은 초등학교 때 대학에 입학한 수학 천재로 나사에 입사했으나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임금 계약직 컴퓨터 계산원으로 일한다. 미국의 첫 유인 위성 발사 사업인 머큐리 계획에 꼭 필요한 해석 기하학에 능통한 유일한 직원으로 선출지만, 첫날부터 인종 차별과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신발은 힐, 치마는 무릎 밑, 블라우스보다는 스웨터, 장신구는 진주 목걸이만.’

남자 선배는 자기 기득권을 뺏길까 봐 정보 공유를 안 한 체 업무지시만 하고 동료들은 책상 외에는 같은 공간의 공유조차 거부한다. 화장실은 힐 신고 왕복 40분, 1,600m의 길을 뛰어 건물 밖의 별관으로 가야 한다. 본부장이 오래 자리를 비우는 이유를 묻자 동료들은 ‘휴식’하러 갔다며 차별을 은폐한다. 어느 날도 화장실을 왕복하다가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온 캐서린은 본부장으로부터 근무 태만 질책을 받고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토해낸다.

'내 동료들은 나와 커피 한 잔 같이 마시는 것도 싫어서 흑인 전용 포트를 친히 마련해주고 이 넓은 건물 안에 내가 쓸 화장실 하나 없다. 밤낮 일했지만 진주 목걸이를 살 만한 월급은 받아보지 못했다. 나는 앞으로도 하루에 몇 번은 화장실에 가야 하니 자주 자리를 비우는 걸 양해해 달라!'


캐서린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일의 보고서에 이름을 못 올리는 굴욕을 겪으면서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프랜드쉽7이 우주에 도착할 수 있는 계산, 지점, 좌표를 도출해 미 우주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나사가 IBM을 도입하면서 인간 컴퓨터 계산원인 캐서린이 무용해지지만 이후 기계의 오류로 다시 그녀의 진가가 발휘되는 상황은 옛 홍콩영화 <여인사십>의 손 씨 부인을 떠올리게도 했다.     



히든 피스 2-도로시 본

옥타비아 스펜서(도로시 본)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의 궤도 진입 계산을 도출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라는 극적 요소 때문에 여주인공 셋 중 캐서린의 비중이 가장 높지만 나는 도로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캐서린이 개인적 영웅 신화에 가깝다면 도로시는 공동체적 인물, 좋은 리더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준 인물이다.

도로시는 흑인 컴퓨터 계산팀의 리더로 실지 업무는 총괄 매니저 역할이지만, 10년째 계약직이다. ‘흑인은 정규직이 될 수 없다’라는 규정 때문에 승진, 월급 인상은커녕 언제 잘릴지 전전긍긍해야 한다. 도로시의 뛰어난 업무 능력,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계획성, 성공을 독식하지 않고 동료들과 나누는 동료애는 차가운 백인 상사 미첼마저 감화시킨다. 캐서린의 선배인 폴이 자기 위치에 대한 위기의식과 시기로 정보 공유를 누락하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과 대비되게 도로시는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과 정보를 팀원들과 공유한다.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 팀이 해체될 것을 예측하고 동료 모두가 프로그래밍 기술을 익히도록 미리 훈련시킨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IBM의 정직원 주임이 되지만 팀 전원 고용을 계약 수록 조건으로 내세운다. 도로시는 나사 최초의 흑인 주임이자 최초의 흑인 IBM 프로그래머가 된다.

현실에 저항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공동체 리더십의 좋은 모델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단 한 명의 히든 피거스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도로시를 뽑겠다.

영화에서는 흑인 전용 화장실로 차별받는 인물이 캐서린으로 나오는데 실지 모델은 도로시라고 한다. 캐서린은 근무 중 한 번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쓴 적이 없었으며 본인이 얘기하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도 많을 정도로 백인의 피부색과 별 차이 없었다고 한다.     


캐빈 코스터너-알 해리슨

좋은 리더십의 또 한 모델은 나사의 본부장인 해리슨이다. 캐서린이 업무 공간 공유의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흑인 전용’ 구역을 없앤다. 흑인 전용이라고 붙은 커피포트의 표식을 떼고 흑인 전용 화장실 팻말도 해머로 부순 뒤 말한다.

“오줌은 한 색깔이다. 흑인 화장실도 백인 화장실도 없다. 그냥 누구나 가까운 곳을 써라.”

수석 엔지니어 폴이 임시직 캐서린을 시기하고 견제해 정보 공유를 하지 않고 업무 배제를 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함께 오르지 못하면 누구도 못 올라간다.”

영화에서 해리슨이 특별히 인권 의식 높은 인물로 묘사되진 않는다. 그는 단지 자기가 맡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업무의 ‘효율성’만을 최우선으로 보는 상사다. 그 자리에 필요한 인물이면 그게 흑인이든 여성이든 상관없고 공이 있는 직원은 그 자체로 인정할 뿐이다. 그게 어딘가. 공정한 선택과 인정이 차별을 없앤다.          



히든 피스 3 메리 잭슨     


“우리가 결승점 앞서갈 기회만 생기면 저들은 결승점을 옮긴다니까!”

쟈넬 모네- 메리 잭슨


수학, 물리 관련 학위가 다 있으면 나사의 엔지니어 응시 자격이 된다. 두 자격증 다 있는 메리가 엔지니어로 응시하자 미첼은 ‘시민 권리가 다 똑같지는 않다’라며 백인에게는 없는 새로운 규정을 제시한다. ‘버지니아대 고급 과정 강좌 이수’. 버지니아대는 백인 전용 대학이다.

“우리가 결승점 앞서갈 기회만 생기면 저들은 결승점을 옮긴다니까!”

새로 생긴 규정에 매리가 터뜨린 분통이다. 메리는 친구들의 응원과 지지로 불합리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흑인 전용 입구와 흑인 전용 좌석이 있는 인종 차별 법정에서 ‘최초의 중요성’으로 판사를 감동시키며 ‘야간대만 허락한다’라는 판결을 얻어낸다. 메리는 나사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다.    

 

메리의 재판 과정에서 나온 ‘최초’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이전까지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편견과 관습을 깨는 첫 모델이다. 또 새로운 시대, 기술의 출발점이다. 새로운 역사의 첫 번째 문을 연 사람, 사건이다. 이 영화는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최초’의 역사적 의미를 보여준다. 미국 최초의 유인 위성 발사 계획에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한 최초의 흑인 여성,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프로그매머이자 관리자,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 백인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흑인 여성.....     


미국의 정치 운동가이자 전미 유색인종 협회장인 메리 처칠 터렐이 1896년에 한 연설. 주석인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이 <짐 크로법>이다.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실시된 대표적 인종차별 법인 이 법은 그녀가 살아있는 내내 유지됐다.  <그렇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 75쪽

지은이 에나 러셀/카밀라 핀 헤이로. 옮긴이 조이스 박. 키스톤


<히든 피겨스>는 낙천적이고 행복한 스토리를 좋아하는 미국 영화 전형이다. 미국 무인 우주선에 참여한 최초의 흑인 여성들이라는 영웅적 요소에 편견과 차별을 깬 첫 번째 여성들이라는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감수성, 메시지를 아주 대중적, 오락적으로 친근하게 표현한다. 12세 관람가 가족영화라 그런지 60년대가 배경인 걸 감안하면 예상과 현실보다 갈등이 너무 쉽고 매끄럽게 해소된다. 인종 차별에는 민감하지만 여성 차별에는 둔감했던 남편들의 반성마저 어찌나 빠른지. 실지로도 저 영화만큼만 차별과 갈등이 쉽고 빨리 해결되면 참 좋을 텐데. 이 친절하고 무난한 영화에서 유일하게 불친절한 건 영화 속 수학 숫자들. 포물선이 고물선 같았던 내겐 저것은 그림인가, 기호인가?     



차별금지법(差別禁止法)은 성별, 성정체성, 장애(신체조건), 병력, 외모, 나이, 출신 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혼인 여부, 성지향성,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보호 처분, 학력,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과 혐오 표현을 금지하는 법률이다. 2007년, 2010년, 2012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입법이 시도됐지만 회기 종료와 함께 폐기되었다. <위키백과>


2007년에 발의한 차별금지법이 1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입법되지 못했는데 코로나 환난의 2020년 폭염의 광장에 모인 저 많은 차별 찬성자들을 보라! 그 중심축엔 ‘차별하지 말라’ 던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가짜 기독교(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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