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본 오락영화 중 가장 재밌었다. 재미, 감동, 의미 삼 박자를 갖춘 명랑 코믹 재난극이다. 12세 관람가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연령, 성별, 민족을 떠나 누구나 좋아할 영화지만 그냥 웃기고 마는 영화는 아니다. 엉덩이 들썩, 심장 쫄깃, 눈물 찔끔, 박장대소 다 있는 종합 선물 세트.
한 문장으로 짧게 말하면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無用之用
영화를 보면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이 떠올랐다. 무용지용은 장자의 ‘쓸모없는 것의 쓸모론’이다. 얼핏 봐서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은 존재가 도리어 크게 쓸 곳이 있다는 말이다. 좀 더 소개하면 이렇다.
어느 날 혜자는 장자가 하는 말 중에 쓸모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지적을 한다. 그러자 장자가 말한다. 이 넓은 땅 중에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은 막상 얼마 안 된다. 발 닿지 않는 나머지 땅을 쓸모없다고 다 파버린다면 사람이 제대로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겠냐? 발 딛고 남은, 쓸모없어 보이는 나머지 땅들이 받치고 있기에 우리가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쓸모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엑시트>는 쓸모없어 보이는 인간과 쓸모없던 취미, 쓸모없는 물건들의 재난 극복기다.
용남은 대학 졸업 후 몇 년 차 백수로 부모 집에서 기식하고 있다. 낮에는 초등학교 운동장 철봉에 매달려 있고 저녁엔 집안 설거지로 시간을 보낸다. “취직했니? 요즘 뭐 하니?” 같은 질문이 싫어 동창회 등의 모임에도 안 나간 지 한참 됐다. 어린 조카도 용남을 부끄러워한다.
어느 주말 용남 가족은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하러 딴 동네 연회장에 간다. 용남은 그곳의 부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의주와 마주친다. 의주는 대학 산악회 동아리 회원으로 한때 용남이 짝사랑했던 후배다. 의주는 실속 없는 부점장 직함을 달고 사장 아들인 점장의 성희롱을 견디면서 일하고 있다.
용남 가족이 사용 제한 시간을 넘기며 음주 가무에 취해 있는 시간 연회장 밖은 연기에 취해 있다. 해직에 앙심을 품은 화학자가 독가스를 제조해 암사동 일대에 무차별 살포를 했기 때문이다. 뉴스에선 해독제가 안 알려진, 가스 흡입 후 몇 분이면 사망하는 특급 독가스라고 한다. 거리 곳곳은 쓰러지는 사람과 피난하는 사람이 뒤엉켜 아수라장이다. 뒤늦게 사태를 알게 된 용남 가족도 탈출을 시도하는데 밖은 안보다 더 위험하다. 건물 위쪽으로 점점 차오르는 가스를 피해 더 높은 옥상으로 갔더니 비상문은 잠겨 있고 열쇠도 없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많이 봐 온 재난 영화의 흔한 서막과 비슷하다.
용남은 재난 극복의 첫 출구인 옥상 문을 과연 어떻게 열 것인가? 미션 임파서블이나 007의 주인공이라면 머리핀을 빼서 문을 열거나 시계나 안경으로 위장했던 첨단 무기로 간단하게 문을 열 것이다. 맥가이버라면 청소 세제로 문을 폭파할 화학 약품을 만들었겠지. 람보나 터미네이터라면 강력한 화력의 장총과 무기보다 강력한 근육질 몸으로 문을 열었을 것이다. 이 영화엔 그런 스마트한 무기나 비상한 두뇌의 고스펙 엘리트 첩보요원도 없고 장총 가진 몸짱 근육맨도 없다. 지질한 백수 루저와 상사의 성추행에 시달리고 있는 서비스직 종사자인 20대 청춘 남녀가 재난 영화의 주인공이다.
우리 주위에서는 아주 흔해도 재난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캐릭터다. 궁하면 통한다 식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잡은 구호품들은 감탄보다는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평소 취업엔 하나도 쓸모없는 “영양가 없는 동아리”로 폄하되던 산악회 때 배운 기술, 구조 훈련이 재난 극복의 중심 무기가 된다. 쓸모없는 인간과 영양가 없는 취미, 청소용품 같은 무용의 물건으로 남을 살리고 자신들도 살린다.
현실이 재난이다 “이제 우리 좀 데려가”
탈출 과정에서 보이는 소품, 미장센은 아주 흔하고 평범하지만, 영화의 주제를 잘 살리면서 시대상도 툭툭 건드린다. 탑 헬스-바른이 치과- 해물탕집 간판 위로 가랑이가 찢어지라 올라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바로 이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살아남는 방식이다. 외모가 능력인 세상에선 몸(짱)도 경쟁력이다. 그렇게 안과 밖을 갈고닦아 이를 악물고 더 높은 곳으로 죽기 살기로 올라가야 한다.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글이 아닌 몸으로 익힌 기술(클라이밍)로 이를 앙다물고 산 넘고 바다 건너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하는 영화 속 두 주인공의 현실이기도 하다.
연회장이 위치한 동네 이름인 '암길동'은 재난이 닥친 거리, 연회장 간판인 '구름 정원'은 미세 먼지와 가스에 갇혀 앞이 보이지 않는 화려한 건물의 환유 같다.
살상 독가스를 피해 좀 더 오래 버티고 살려면 더 높은 건물로 올라가야 한다. 높은 데 올라갈수록, 땅에서 더 멀어질수록 안전하다는 영화 속 설정은 현실 속 삶이기도 하다. 높은 곳은 안전한 곳, 좋은 곳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남보다 더 잘 살 확률이 크지만 용남처럼 목숨을 내놓고 죽기 살기로 달려야 한다. 거기서 오래 살기 위해 또 죽기 살기로 버텨야 한다.
용남은 가스를 피하기 위해 이 옥상, 저 옥상으로 달리고 또 달리면서 ‘높은 곳’의 의미, 가치를 비로소 깨닫는다.
“저런 데. (살아 돌아가면) 저렇게 높은 건물로 된 회사에 원서 낼 거야. 층수만 보고. 이쪽에 있는 사람들 다 구조해 줄 수 있을 거 아니야”
<엑시트>는 독가스를 대피하는 재난 영화의 외피 속에 우리 삶 자체가 재난임을 말한다.
고학력 장기 실업, 불안정한 직장 속에서 갑질에 시달리는 청춘, 무분별한 증오가 낳은 참사, 그런 이전투구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 삶 자체가 재난이다.
영화 초반 동아리 친구와 술을 마시던 용남은 휴대폰의 재난 경보 알람을 듣는다. 둘은 지진을 두고 이런 대화를 한다.
“우리 동네 아니라서 다행이네”
“넌 네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냐? 넌 지금 재난 속에 있어. 지진, 쓰나미 그런 것만 재난이 아니라 우리 상황이 재난, 그 자체라고!”
한정된 인원만 태울 수 있는 헬기 앞에 선 두 주인공의 갈등과 선택은 자연스럽게 세월호를 연상시키고, 끊어진 고공 크레인 위에서 “이제 우리 좀 데려가!”라고 외치는 모습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로운 고공 농성이 연상된다.
건물 안 고객을 다 대피시키고 마지막 남은 헬기 자리를 양보한 희주는 연회장 책임자인 점장이 아닌, 그 점장이 성희롱하던 여직원이다. 가족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마지막 남은 자리를 양보한 용남은 어린 조카한테까지 무시당하던 루저, 백수다.
첫 번째 헬기를 양보하던 모습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희생이라면 두 번째 헬기의 양보는 다른 공간의 불행을 바라보는 어른의 태도, 연대를 생각게 한다. 세상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지만 그 방식은 무겁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본능과 도덕 앞에 선 인간의 두려움과 선택을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생략과 집중이다. 재난 영화의 필수 공식 같은 악의 배경, 악인과의 싸움이 없다. 또 영웅적인 주인공 한 명을 돋보이게 하려고 출연자 전부를 죽이는 대량 희생도 없다. 희생자는 많지만 희생자를 전시하는 대신 잠깐, 간접적으로 처리한다.
거대 자본과 첨단 기술이 없는 재난 영화의 좋은 선례다. 세기말적 암울한 분위기의 재난 영화가 아닌 명랑 재난극이다. 감독은 세상의 부조리를 무거움이 아닌 코믹으로 표현하는데 능하다. 영화를 보고 감독의 이력을 살펴보니 장편은 첫 영화고 코미디 단편을 많이 찍었다. 류승완 감독의 조연출부 출신이고 이 영화 제작사는 외유내강이었다. 주제와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과 활용이 류승완과 성룡을 떠올리게 한다.
드론의 연대
<엑시트>의 탈출은 아날로그 하지만, 영화 속에서 탈출을 보도하는 방식은 아주 스마트하다. 재난도 대중의 ‘구경거리’다. 독가스 앞에서도 인증 사진을 찍고 실시간 보도에선 공중파가 1인 미디어에 밀린다. 파파라치와 인터넷의 온갖 1인 방송은 용남과 의주의 목숨 건 탈출을 실시간 생중계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 ‘구경거리’를 관음증, 포르노그래피로만 몰지 않고 구조(救助)의 새로운 조력자, 연대로 승화시킨다. 재난의 구조엔 공권력, 방송, 헬기 같은 큰 힘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시, 공간 구석구석에서 그들을 도운 것은 휴대폰, 유투브, 드론 같은 작은 기기, 1인 미디어다. 첨단 인터넷 기기와 아날로그, 전자 수신호와 몸 쓰기가 이질감 없이 조화롭다. 어떻게 쓰냐에 따라 무기도 되고 이기(利器)도 되는 sns의 명암과 기능을 유쾌하게 그린다.
생사를 넘나들며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남녀 주인공의 흔한 포옹, 키스신 없는 담백한 엔딩도 좋았다. ‘1년 후’라는 에필로그도 없다. 용남은 여전히 백수고 의주는 연회장의 영양가 없는 부점장 상태에서 끝난다. 이게 이 영화의 좋은 점이다.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을 포장하지는 않는 것. 그러나 영화를 본 관객은 선하고 짠한 두 주인공의 앞날을 축복하리라. 삼풍 백화점의 최후 생존자들이 생존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끈질긴 인내로 좋은 곳에 취직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용남과 여주는 생존만 보도된 게 아니라 탈출 전 과정이 전국 공중파는 물론 인터넷 곳곳에도 생방송되지 않았나. 그들이 얼마나 좋은 체력에 희생과 양보심까지 지닌 청춘인가를.
첫 단편 영화인데 깔끔한 연출도 좋고 여주인공을 다루는 방식도 좋았다. 재난 영화에서 민폐 캐릭터 아니면 보조 역할로 소모되던 여성이 이 영화에선 남자 주인공과 동등한 역할을 한다. <공조>에서도 느꼈지만 윤아는 진지한 정극보다 코미디에서 더 돋보인다. 나는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라는 조용필 노래 한 대목이 생각났지만, 세상은 안 믿어도 인간은 믿고 싶은 감독은 이승환의 <슈퍼히어로>를 엔딩곡으로 택했다.
I’m a SUPER HERO 일생일대의 사건 내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충격 누구에게나 그들만의 기회가,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능력들 Oh Oh Oh~~~ ..... 너희들 모두 특별해 이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어 이 순간부터 넌 세상의 중심이야 이승환 <슈퍼 히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