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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Apr 02. 2020

<동사서독>과 <집중과 영혼>

잊지 못하는 자가 진 것이다

 

그는 가난한 검객이지만 생활은 규칙적이다     


나는 김영민의 책도 이제 제법 읽어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도 얼추 짐작할 정도는 됐고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서 앞, 뒤 문장에 맞추어 읽어내는 재미도 나름 즐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새로 문을 연 그의 홈페이지를 처음 대했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프로필 문구를 비롯해 카테고리란의 용어나 개념들이 생소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나라' 말인지 감이 안 잡히는 단어도 있었다. 검색기로 대충의 감만 겨우 잡았다.


홈페이지 프로필 문구는 이렇다.

[他雖然是一個落魂的劍客但是他的生活很有規律]     

검색의 도움으로 '그의 생활은 아주 규칙적이다, 검소하다'라는 但是他的生活很有規律 의 개념 파악은 했지만 個落魂的劍客이라는 앞 한자들과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다른 분의 도움까지 받아서 겨우 짐작한 것이 '그는 추락하는 영혼의 검객에 불과하지만 아주 규칙적으로 살아간다.'였다. 個落魂的-은 '추락하는' 보다는 '가난한'이란 뜻이었다.

자진해서 재야의 고수로 남은 선생 자신의 처지나 수신에 대한 문구 정도로 이해하고 잠시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홈피 대문의 저 글은 <집중과 영혼> 속에서 아래 문장으로 변용된다.

'한가한 중에 거하는 꼴로서 그 내면을 살필 수 있다'(105쪽, 1장 7편-집중과 신)

<집중과 영혼>. 김영민. 글항아리. 2017. 10. 10


5장 32 편에선 거의 똑같은 문장이 나왔다.

ㅡ그는 한물간 검객이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동사서독>양자 웨이. 1994

(618쪽, 내 앎은 내것이 아니다)      


양조위가 눈멀어 가는 무사 역으로 나온 이 장면의 자막 지문은 '그는 가난한 검객이지만 생활은 규칙적이다'이다. 처음에 목차를 훑던 중 '달걀은 幻이다'라는 소제목에서는 <동사서독>을 단박에 떠올렸지만 선생의 홈페이지 프로필 문구를 읽을 때는 이 영화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규칙적인 생활'은 이 책의 중요 화두인 '집중'에 필요한 중요한 생활 양식, 형식이기도 하다. '앎, 공부'란 아는 것을 생활 양식에 내려앉게 해서 앎보다 몸이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 방식과 규범을 평생 일정한 규칙 속에 습관화하는 것이다.

ㅡ형식들과 더불어 삶을 살며....형식들이 제 몫을 다하는 자리에서마다 인간의 현재는 유지되고, 형식들이 무너지는 자리에서마다 인간의 과거가 드러나며, 형식들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자리에서마다 인간의 미래가 손짓한다. ('내 앎은 내 것이 아니다' 620쪽)

 

에서 <동사서독>과 관련된 이야기를 세 편이나 읽고 나니 문득 그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1995년 개봉판은 다운로드할 수 있는 곳이 없었고 2013년 감독 재편집판 <동사서독 리덕스>를 마침 네이버에서 무료 상영하고 있었다. 사실 이 영화를 20대 때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는 그의 영화를 꽤 좋아했는데도 집중이 잘 안 됐었다. 서사 중심의 영화와 달리 상징과 이미지로 말하는 이 영화의 1995년 판은 이야기의 생략성이 리덕스 판보다 더 많아서 줄거리나 인물 간 관계도도 잘 파악하지 못한체 나왔던 같다. 다시 보면서 더 좋아지는 영화가 있는데 왕가위 영화, 그중에서도 이 영화가 그랬다. 재개봉 직후에 집에서 다운로드해서 보고 이번에 세 번째 봤는데 앞서 발견하지 못했던 이야기 구조나 감상이 새로 얹어지는 것이 있었다.    


좌/1995년 포스터.     우/ 2013년 리덕스 포스터


달걀과 바꾼 손가락

- 검이 빨랐던 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기존 왕가위 영화의 상실감은 원하는 게 있어도 말을 안 하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해치는, 상처받을까 봐 먼저 상처 주는, 떠나고 난 뒤에야 깨닫는 소중함의 허망함을 안고 살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동사서독>에는 이런 왕가위 영화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유형의 낯선 캐릭터가 한 명 나온다. 달걀 하나에 제 손가락을 잃은 홍칠(장학우)인데 그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분명히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홍칠을 제외한 이 영화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애증과 상실감으로 괴로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허망한 약속에 집착하고, 지키고 싶거나 지켜야 할 것을 한순간의 분노나 자존심으로 잃었으며 되돌리지 못할 과거도 놓지 못한다. 자신도 타인도 회의하며 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괴롭히느라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 자들이다. 홍칠만 유일하게 오로지 기억의 괴로움 없이 현재성의 충실함으로 미래로 나가는 인물이다.     


극빈한 고수 검객 홍칠은 사막의 해결사 구양봉/동사 (장국영) 밑의 청부 검객이다. 어느날 당나귀와 달걀이 전재산인 가난한 여인이 찾아와 구양봉에게 동생의 복수를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홍칠이 복수혈전을 벌이다가 손가락 하나를 잃는다. "달걀이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냐"라며 냉소하는 구양봉에게 홍칠은 말한다.     


없소. 그래도 기분은 좋소. 이게 나요. 달걀이 손가락과 바꿀 만큼 안 다쳐야 했겠지만 검이 옛날처럼 빠르지 못했소. 옛날에 검이 빨랐던 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대가를 바란 적은 없소. 난 안 변할 줄 알았는데 부탁을 받는 순간 내가 변했다는 걸 느꼈소. 난 거절했소. 당신이 거절했을 테니까. 내게 실망했소. 당신과 지내면서 나는 나를 잊어가고 있었소. 당신처럼 되기는 싫소. 내가 아는 구양봉은 계란 하나에 목숨 걸지는 않을 테니까. 그게 우리의 차이요.     


홍칠의 이런 행동과 자기만족 같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집중과 영혼> 113쪽에서 '신경화학적 보상'과 '약간의 기름칠'이라는 말을 찾을수 있다.

친절하게 굴거나 배려심을 발휘하거나 너그러운 행동을 하려면 시간과 에너지. 때로는 돈까지 필요하다. 따라서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은 대가를 치른 대신 다소 신경화학적인 보상을 받게 되고,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바퀴에는 약간의 기름칠이 더해지는 것이다. (클루거. 敬, 또 하나의 집중)     

홍칠은 정념으로 세상을 떠도는 이 영화의 여타 인물들과 달리 신념으로 살며 연인(아내)을 잃거나 버린 극 중 인물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함께 떠나는 사람이다. 또한, 이 영화 속 모든 인물이 근친적 사랑으로 연결된 것과 달리 유일하게 아내, 연인을 공유하지 않는 독자적 인물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알고 보니 (다) 내 연인이나 아내를 연모하는' 사이로 죄다 친구나 업무 관계로 얽혀있다. 친구, 남매, 친구의 부인, 형수로 얽힌 근친적 사랑은 각각 다른 모습, 이름을 달고 있지만 모용연과 모룡언(임청하)처럼 원래는 한 몸인데 실연과 상처로 자아가 분열되고 복합된 변주 같다.     

‘사람들은 좌절하면 자기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모용언과 모용연은 두 개의 모습을 지닌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의 정체는 상처받은 사람인 것’이다.
(동사서독-구양봉의 대사)


홍칠은 타의나 어떤 상황으로 자기 삶이 어긋나서 떠도는 다른 주인공들과 달리 (일매진 계획성은 없어 보이지만) 스스로 운명을 어긋내고 개척해가는 자다.

ㅡ과거의 사적 요인들에 떠밀려 쾌락/불쾌의 장면을 강박적, 충동적으로 재연하기보다 미래를 향해 이를 주체적, 창의적으로 연기하거나 일매지게 계획하는 능력은 인간의 생산적 활동에 동원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코드다. (66쪽, 집중이란 무엇인가)     


사막 건너편엔 뭐가 있소? 사막이 있겠지.  그는 고의로 바람을 거슬러 갔다

   

기억ㅡ잊지 못하는 자가 진 것이다     


왕가위는 어긋나는 인연, 그로 인한 상실감과 함께 '기억'에 관한 괴로움도 자주 말하는데 이 영화 역시 그렇다. 허망한 술 한잔 약속에 집착하고 이미 내 것이 아닌 대상들에 대한 질투와 미련을 접지 못한 채 과거 속에서 사는 이들의 대동소이한 이야기들이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력 때문이라면서도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라며 애원한다. (자애인-장만옥)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잊지 않는 일 외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잊지 말자며 애원하고 다짐하던 집착은 사랑도 마음도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죽을 때가 돼서야 겨우 깨닫는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사람 마음이라-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대 마음이 움직인 것일 뿐이다.   

먼저 상처받은 사람이 진 것이 아니라 오래 기억한 사람이 진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영화에서는 기억력이 없다면 매일매일이 새로울 것이라 했지만 그것은 기억 상실자에게 너 행복하겠어! 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기억력이 없어서 어제와 같은 어리석음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다시 되풀이하게 되는 끔찍함이란! 치매 환자나 광인이 화내거나 분노하는 것은 분노의 기억일까, 분노의 감각일까?

'술 한 잔에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취생몽사'는 영화에서조차 '농담'이라고 했다.    

 


4. 사막, 강, 복사꽃     


왕가위는 상실감으로 인한 황량함, 한 잔 술에 모든 기억을 잊는다는 몽환의 이미지를 사막이란 공간으로 표현한다. 사막은 정착, 가족, 수확 같은 안정적이고 생산적 풍요감과 반대되는 황야, 방랑, 세속과는 멀리 떨어진 초월적 비현실성을 나타내기 유용하다. 영화 속 사막과 그 주변부 배경, 이미지들은 서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먼지 날리는 광활한 사막, 주막과 여관처럼 보이는 청부 해결사 구양봉의 집, 달걀만 갖고 복수를 해 달라는 불쌍한 여인과 말을 탄 마적떼 설정도 그다. 갓 쓴 마적떼들은 서부의 악당들로, 사막의 검객들은 총대신 긴 칼을 찬 카우보이로 대체됐다. 검객들의 싸움에서 간간이 보이는 신발, 구양봉이 맨발의 검객 홍칠에게 신발을 사주면서 '신발을 신은 검객이 더 비싸기 때문'이라는 장면에선 카우보이들의 유니폼인 가죽 앵글부츠 연상다.     


주인공들은 이별하거나 새로운 출발을 할 때 자기가 살던 곳에 불을 지른다. 이 영화 포스터의 영어 제목은 '시간이 남긴 재'던데 사막의 먼지나 모래는 타고 남은 '재'와도 연결되는 이미지다. 활활 타는 불길을 가까운 거리에서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면 강은 먼 롱 샷으로 보여준다. 불이 어떤 파국이나 결단, 새로운 출발을 담은 현재성이라면 강은 과거로부터 현재의 시간적 서사성,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 상실, 덧없음의 세계다.     


영화 속에서 애인은 나를 배신하거나 떠나면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지만 계절은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찾아온다. 이 영화는 각각의 인물을 사계절 중 한 계절씩에 담아 얘기하는데 '봄, 복사꽃'은 모두에게 의미 있는 계절과 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누구나 복사꽃 필 때를 얘기하지만 아무도 복사꽃 길을 다시 걷지 못하고 헤어진다.

봄은 달지만 짧고 단 게 짧으니 슬프다. 슬픔이 없는 아름다움은 없고 꽃의 화사함도 잠시라 허무하니 한낱 일장춘몽 같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이 덧없고 허무하지만, 몰라서 마음대로 안 되고 알고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직 그리 많지 않다(100쪽, 집중과 神)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동사서독)    
 봄날이 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무도 살아내지는 못한다
. (김영민, 『봄날은 간다』)          


<동사서독>의 인물들은 <집중과 영혼> 식으로 말하면 들뜬 열중만 하다가 애착의 잉여에 치여 차분한 집중은 못 맞이하고 에너지만 낭비하다 가버리는 대게의 우리다. 겨우 차분한 순간은 상사의 장만옥과 시력을 잃어가던 맹무살수(양조위)가 죽어가던 어느 한순간쯤일 것이다.

집중 그 자체가 능사는 아니다. 인생은 봄날처럼 짧으니 이 짧음을 도외시한 채 자신의 에너지를 분방하게 낭비할 순 없지 않겠느냐 (90~91쪽, 노동과 집중)     


<집중과 영혼> 속의 말을 빌려 <동사서독>의 인물들을 해석하자면 이런 유형이다.

애착 혹은 이에 따르는 섣부른 동일시는 대체물을 얻지 못하리라(못했다)는 불안과 우울, 혹은 욕망의 대상을 대체하지 못하는 일종의 무능력과 관련되는 증상이다.....바지에 붙으면 좀체 떨어지지 않는 껌과 이몽룡을 일편단심으로 고집하는 춘향이.....와 로미오들의 행위에는 마침내 맹목에 이르기까지 텅비어버린 충실성이 자리한다....선택했다는 바로 그 사실 탓에 그 사실을 선택 이상의 불변침변의 도그마로 굳혀버리는 것. (14쪽, 애착)     



김영민은 '인생은 짧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거나 '사람만이 절망이다'라는 말을 곧잘 되뇌지만 '함께, 그러나 그들을 넘어 어긋내는 가운데 얻는 성취'의 하이얀 희망을 놓지 않는다.

현실의 욕망이 요구하는 대상에 코를 박고 살아가는 대신, 지금 여기에 없는 현실적 공허를 생활의 중요한 벼리처럼 기대하고 살피고 집중하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서! (44쪽, 식탁의 인류학)     

표현 양식과 철학적 주제의 다름에도 홍상수나 왕가위의 영화 어떤 지점에서 김영민의 글을 떠올리는 것은 '어긋남의 무늬'들이나 '반복의 차이'에 관한 이미지들 때문이다. 김영민은 '인간의 (얼룩진) 무늬'에 대한 성찰이 인문이고 '어긋남'에 대한 숙고가 인문학적 사고라고 했다.

1시간 30분 정도의 옛 영화를 보면서 요즘의 영화들은 쓸데없이 두 시간 넘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물을 깊게 파는 것이 능사는 아니듯'(131쪽, 敬, 또 하나의 집중) 길게 만든다고 능사는 아닌데ㅡ라고 말을 하나는 또 왜 이렇게 긴 글을 쓴 것인지. 길게 쓰는 것이 능사는 아닌데.   



5. 무사의 취업난과 열정페이     


이 영화를 단순 무식하게 얘기하면 사막의 해결사이자 주모인 장국영을 거쳐 간 청부 검객들과 청부인들의 이야기다. 검술로는 한 경지씩 오른 인물들이지만 한결같이 밥과 고향 갈 여비를 벌기 위해 청부 살인을 할 정도로 극빈해 요즘의 극심한 취업난이나 열정페이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이 영화에서 사막 고수들도 피해 갈 수 없었던 '밥과 돈'에 대한 인상적인 대사와 그림 같은 멋진 영상 몇 컷 올리며 마친다.

“무공 고수도 밥은 먹어야지. 배는 또 금방 고파지지. "
돈을 받고도 세지 않는 사람은 그 돈을 금방 다 써버린다. 하지만 홍칠은 자세히 세었다. 이런 사람은 내 곁을 곧 떠난다는 걸 나는 안다. 내가 그에게 신발을 사준 것은 신발을 신은 검객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흔들리는 영상이 왕가위의 인장 같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화면들은 영화적이라기보다는 아주 회화적인데 프린트 출력해서 빈 벽의 액자로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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