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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un 13. 2019

<기생충>과 <죄와 벌>

봉준호에게서 도스토옙스키를 보다


봉준호의 '선(線)'과  도스토옙스키의 '선(線)'


한 영화가 아무리 훌륭해도 한 상영관 점유율이 전체 영화의 반 가까이 차지하는 게 맞나? 

<기생충>의 들러리 취급하듯 마지못해 내 준 같은 개봉관의 불균형한 배급을 보노라니 이것은 봉준호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한 계급과 자본에 관한 사상과 다른가? 싶었다.

그런 이유로 영화관 바로 옆의 은행에 갈 일이 없었다면 애초 예정대로 이 영화가 최대한 조용해질 상영 마지막 날 평일이나 인터넷으로 넘어온 뒤 봤을 것이다. 하필 은행이 극장과 붙어 있는데 굳이 이날을 피해 다시 오는 것도 무슨 유치한 치기 같아서 간 김에 봤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여행 같이 가기로 한 친구 중 한 명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결혼 전 영화광이었던 친구다.

"지금 <기생충> 보고 나오는 길이야"
"어땠어? 네가 보면 우울해할 것 같아 재미있고 좋았지만 보라는 소리를 못 했어"
"귀촌해 촌 놈 다 된 줄 알았더니 부르주아는 귀촌해서도 취향은 못 버군. 집 앞에 영화관 있는 나보다 개봉 영화를 항상 신속하게 본단 말이야."


기택(송강호) 가족이 사는 동네

부르주아 부농이라 역시 빠르군-이라거나, 네가 보면 좀 우울할 것 같았어-라고 무심히 듣고 말할 수 있는 우리는 '선을 넘은' 사이다. 친구는 영화 속 박 사장 정도의 재벌은 아니지만 어릴 때 2층 단독 주택을 세입자 없이 통으로 쓰던 집의 딸이었고, 그 시절엔 흔치 않게 백화점 옷만 입었고, 아버지가 공장주고 어머닌 학창 시절 내내 학교 육성회 임원을 한 집의 딸이었다. 나는 당시 육성회비를 제일 늦게 내던 아이였고, 어머닌 공장 식당 밥을 해주러 다녔고, 우리 집은 단독 주택 2층 젤 구석진 곳이거나 한 마당, 한 화장실을 쓰던 다세대 주택의 한 칸이거나 기택의 가족이 살던 그런 곳의 세입자였다.

처지가 너무 다른 두 계급이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려면 더 많이 가진 자가 '선'을 넘는데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다행히 나보다 배려심, 인내심, 사교성이 몇 배는 더 좋은 친구 덕분에 우리는 서로가 그 '선'을 밟고 넘어 서로의 상처나 자산을 무시나 시기로 오해하지 않는 친구가 되었다. 부르주아 부농이라고 빗댄, 자본가의 딸인 내 친구는 농민회 소속으로 자신의 선을 넘어와 밭을 일구며 시민, 농민 운동을 하고 있다.



두 시간이 쓱 지나다. 아! 와~ 헐~ 헉! 같은 감탄사도 자주 내뱉었고 중간중간 낄낄거리며 웃다. 그런데 내 감은 거기서 더 나가지 않았다. 여러 번 감탄과 경탄을 번복했지만, 감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나에게 한 줄 평을 하라면 '잘 만든 냉소극' '선과 냄새에 관한 블랙 코미디' 정도 되겠다. 장르적으론 <살인의 추억>이 훨씬 좋았고 인간에 대한 시선으론 <플란다스의 개>가 더 좋았다.
봉준호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는 알고도 남겠으나 '어떤 사람들을 보고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가 생략된 재밌는 난장판이었다. 시니컬한 세상과, 모두가 알고 보면 죄인(모두가 알고 보면 피해자라는 해석 더 마땅찮다.)이라는 표현이 감독이 바라는 세상의 반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내겐 선을 넘지 못한 건 주인공들이 아니라 감독이라는 생각 든다.

스포에 연연하지 않고 어느 땐 스포를 찾아다니지만 이건 장르 영화니까, 거장 깐느 봉의 스포일러를 방출하는 건 매국, 반 예술 행위라니까 SNS며 포털에 주저리주저리 오르는 글들 애써 외면하며 최대한 사전 정보에 무지한 채로 갔다. 영화를 보고 나서 후기를 좀 훑어보니 '나도 과거엔 그랬지'라는 회고담이 많아 씁쓸했다. 현재는 안 그렇다는 반영이며 이젠 드라마 <응답하라-> 식의 낭만이나 극복기쯤 된다는 말 같아서. 과거가 아름답게 회고되면 '추억'이고 고통으로 아파오 '기억'이다. 응답하라나 재난 극복기는 낭만적 회고의 추억이다. 상처를 추억처럼 말할 수 있게 됐다면 그 상처, 콤플렉스는 이미 극복된 (과거의)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그때는 그랬지'라는 식의 회고담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나는 기택네 같은 지하실에 살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이미지는 내게 아직 추억보다는 기억에 가깝다. 노친네나 내가 의료보험 안 되는 고액의 중병이 들거나 하찮은 지금 일이라도 그만두면 다시 그 기억이 수년 내 현실 복원될 수 있다는 선체험의 각인 때문이다. 친구가 '네가 보면 우울해할 것 같아서'라고 이야기한 것은 내가 아직 그런 선체험에서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정서, 환경임을 잘 헤아렸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 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 생각났다. 두 작가의 작품 속엔 영화 속 내내 나오는 ‘냄새’가 자주 묘사되고 책 속의 인물들은 '지하에 살거나 지하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영화 속 기택네 동네와 집의 장면들에선 위건 부두에 나온 '도시 빈민가의 주택 냄새에 대한 상류층의 혐오'가, ‘선을 넘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죄와 벌>을, 지극히 불쌍한데도 동정심 일으키기 힘든 기괴하고 불쾌한 지하 인간에게서는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연상됐다. 감독이 두 작가나 작품에 영향을 받았는지, 영화 만들 때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라도 영향을 받거나 차용했을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다.

도스토옙스키나 <죄와 벌>을 좋아하는 사람은 죄와 벌의 원제인 prestuplenie i nakazanie라는 러시아 원제의 뜻 속에는 ‘경계선, 금기’ ‘문턱을 넘는 것’ ‘여기서 저기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가는'이라는 '초월'의 이중적 뜻도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 (또 주인공이 세상을 인식하는 시각 중에는 "벌레 같은 인간-기생충론"도 있지 않은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서로의 선을 끝내 넘지 못해 죽거나 죽인다. 혹은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 죽거나 죽인다.
<죄와 벌>에서 로쟈가 전당포 주인을 죽인 것, 봉 <기생충> 주인공들이 서로서로 죽이는 이유 '선'은 겹친다.


죄를 저지르는 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지만, 죄의 용서와 구원을 받는 일도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넘어서야!' 되는 일이다.... 무엇이 그를 살인 행위로 이끌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자기 자신의 비참하며 의지할 데 없는 처지가 원인이며..... 요컨대 자기가 사람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은 원래 경솔하고 소심하며 가난과 실의 때문에 한층 불안해진 탓이라고 덧붙였다.

인생은 인간의 의지대로 풀리지 않는다. 뜻밖의 사고와 파산, 재난과 질병과 천재지변은 인간의 의지와 별 관계가 없다. 자신이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지하 생활자의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그는 아무것도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 “나는 사악했을 뿐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악한 자도, 선한 자도 비열한 자도, 정직한 자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민음사



이 영화는 내겐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봉준호의 헌정 같게도 느껴졌는데, 둘 사이에 다른 것은 각자가 저마다 지닌 자기 한계에 대한 태도, '선을 넘는 것'에 대한 태도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인간은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고정관념에 저항하며, 외부 조건에 굴복되지 않는 '자유의지' 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지하 생활자는 “2x2=4”라 명명한다. 그것은 인간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고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법칙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진리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운명, 혹은 자연의 법칙을 의미할 수 있다. 생로병사일 수도 있고 생물학적 결정론일 수도 있다. 그것은 철옹성이다. 이 철옹성을 향해 지하생활자는 인간의 불합리한 욕망을 가지고 돌진한다. “모든 게 도표와 수학에 따라 진행되고 오직 ‘2x2=4’만이 주위에 있을 때 인간 자신의 의지라는 것은 어디 있는가?

나는 당신들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조차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당신들은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했고 거짓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왔다. 그래서 당신들에 비하면 내가 더 살아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세히 봐라!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정확하게 이 ‘살아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닭장을 궁전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 년 동안 임대해 살 수 있고 치과 의사의 이름이 씌어 있는 간판이 달려 있는 아파트의 건축 계획을 내 욕망의 왕관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다. 나의 욕망을 분쇄하라. 나의 이상들을 말살시켜라」
<지하생활사의 수기>. 문예출판사


냉소를 냉소하며 봉준호에게서 도스토옙스키를 호출하던 나는 기택의 ‘무계획한 계획’을 들으면서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끄적거려 놓은 글에서 ‘계획’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니 이런 말이 나왔다.


[미래를 미리 준비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단지 그날그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자기 미래에 대해 무책임하거나 무계획해서만은 아니다. 시간적, 금전적 여건들이 현재를 살아내기도 근근해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없는 이들도 많다. 계획이 별무소용인 이들은 그저 현실을 충실히 살며 미래를 욕심내지 않는 게 낙담하지 않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나름의 내력을 터득하게 된다. 2018년 4월 13일의 일기]

나를 위시한 저런 냉소엔 공감과 감탄은 있어도 감동이 없다. 봉준호 영화만큼의 감탄을 못 일으킨 로치나 히로까즈 영화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가슴으로 봤는데 기생충은 가슴 밖, 머릿속에서만 감탄하다 말았다. 히로까즈 보고 싶은 사람, 켄로치 보고 싶은 세상이 봉준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의 복원에 뛰어났고 그것만도 아무나의 능력은 아니지만, 감탄을 넘어서는 그의 한계 너머를 보고 싶다는 것은 나의 실패할 계획, 바람일까? ‘선을 넘는다’라는 게  각자 자기의 ‘한계를 넘는’ 다는 해석도 된다면 봉준호, 그를 향한 감탄을 넘어 한계 너머의 감동을 보고 싶다.


사족) 내 브런치 북의 제목은 <천만 영화는 없어요>였다. 그간 내가 브런치에 쓴 영화 리뷰 중 천만 영화는 '천만예요' 였는데 <기생충>이 유일한 천만영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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